가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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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설 명절에 아들네와 딸네가 내려올까 말까 망설였다. 전염병이 잦아들지 않아 혹 부모에게 부담될지도 몰라 신경 쓰였던가 보다. 고향 방문을 자제하라는 방역 당국의 당부도, 찜찜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밖에 숙소를 정할까 넌지시 운을 떼는 딸에게, 두말없이 내려오라 했다. 관광객은 제약 없이 오는데, 정작 와야 할 사람들은 주저하는 현실이다. 두 해 명절을 따로 보냈고, 다 모여도 몇 안 된다.

좁아 불편해도 비비적거리며 어울려 사는 게 가족이다. 가족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서로 지켜줄 삶의 근원이자 든든한 기둥이다. 네 것 내 것 따지지 않고, 공유하는 집안의 작은 사회다. 자식들이 분가해 나가고 노부부가 오붓하게 사는 가정이 많다. 명절이나 가족 행사에 한꺼번에 들이닥친 자식들로, 생활 균형이 깨져 불편할 수 있다. 서로 편하게 지내자며 따로 숙소를 마련하는 가정도 더러 있는 모양이다. 변화하는 시대에 합리적인 신풍속이라 할 수 있겠다.

손자들이 어릴 적에는 공간이 넉넉했다. 이 방 저 방 널린 게 책이요, 장난감이었다. 그런 틈에서 책을 읽거나 놀이를 즐겼다. 혹 발에 밟힐까 피해 다니며 치우지 않은 것은, 아이들만의 동심 세계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내 앞에서 나를 닮은 자손이 어질러 놓은 자리도 즐거움이자 희망이었다.

잠깐 못 본 사이 훌쩍 자란 모습이 보인다. 고개를 치켜 올려다보면, 난 왜소한 고목처럼 느껴진다. 큰손자는 올해 대학에 합격해 어른처럼 늠름해 대견하다. 작은 손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전 어른처럼 과묵하다. 긴 머리가 찰랑대는 손녀는 해 질 무렵 지붕 위에 핀 하얀 박꽃처럼 복스럽다.

청소년기엔 독립된 공간이 필요하다.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 한다. 부모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어 조심스러운 영역이다. 풍족한 시대에 저출산으로 둘이나 외둥이 가정이 많아, 자기 소유에 애착이 강하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게 익숙지 않아, 서로 나누어 쓴다는 개념이 약한 편이다.

가족이란 함께 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고루한 얘기지만, 우리가 자랄 적에는 형제들이 한방에서 이불자락을 서로 끌어당기며 다투다 잠들곤 했다. 양푼에 밥을 퍼 잽싸게 숟가락이 들락거리고, 멀건 된장 뚝배기 속 건더기를 건지느라 경쟁하듯 퍼먹었다.

지금 같으면 비위생적이라고 고개를 돌리지만, 그렇게 살아도 큰 병치레 없이 무탈하게 잘 자랐다. 여럿이 어울려 자란 아이는 성격도 모난 각 없이 둥글다. 식구들 틈에서 사회생활을 익히면서 이해심과 배려, 양보와 도타운 우애가 싹 텄다. 가정 안에서 배우는 간접 체험 교육이다. 지금 아이들에겐 이런 추억거리가 없을 것 같다. 어른이 되면 한자리에 모여, 옛 추억을 꺼내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인데….

장롱 속 이부자리가 모두 나와 방마다 이부자리다. 오랜만에 한방에서 나란히 잠든 모습이 뿌듯해, 입가에 절로 미소가 돈다. 가족이니까 이렇게 할 수 있는 것, 어찌 사랑스럽지 않으랴. 함께 어울려 먹는 음식은 맛이 더욱 좋다. 우리 부부만 설을 보냈다면 쓸쓸하고 외로웠을 텐데, 오랜만에 따뜻하고 풍족한 명절을 보냈다. 요즈음 아이들에겐 가족에 대한 구성원이 누구까지 해당하는지, 개념이 모호하다고 한다. 몇 안 되는 손자들에게 소소한 경험도 필요하다. 집으로 돌아가면 무슨 생각을 품게 될지 궁금하다. 올해 설은 가족과 함께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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