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아낙의 허벅·옹기 생산하던 가마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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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고산평야, 노랑굴·검은굴
둑으로 경계 삼던 고산 농지
철새 쫓아야 했던 특성 영향

흙과 물 풍부해 도요지 구축
타지역과 달리 ‘돌가마’ 특징
신도리 터 등 도기념물 지정
고산평야 농경지. 고산평야에서는 돌담 대신 둑을 밭의 경계로 삼아 밭담이 보이지 않는다. 농작물을 망치는 철새들을 쫓아내는 일을 했던 캐초관에게는 돌담 없는 밭들이 좋은 조건이 됐을 것이다.
고산평야 농경지. 고산평야에서는 돌담 대신 둑을 밭의 경계로 삼아 밭담이 보이지 않는다. 농작물을 망치는 철새들을 쫓아내는 일을 했던 캐초관에게는 돌담 없는 밭들이 좋은 조건이 됐을 것이다.

▲ 철새와 캐초관의 각축장이던 고산평야

화산섬인 제주도는 밭담 천국이다. 제주선인들이 일궈낸 다양한 형태의 밭담은 이젠 세계농업유산으로 지정되어 영롱한 보물로 진화하고 있다.

‘흑룡만리 제주밭담’의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밭 사이에 경계가 없어, 힘센 자들이 약한 자의 토지를 잠식하기에, (1234년) 김구 판관이 지역민들의 고충을 듣고, 돌을 모아 담을 쌓고 경계선을 구분 지으니 지역민들이 편하였다.’라고 탐라지(1653년)는 전한다.

이러한 역사적 농업유산인 밭담이 고산평야에선 잘 보이질 않는다. 이곳의 농경지는 대개 담이 없는 무장전(無牆田)이다. 돌담 대신 둑으로 밭의 경계로 삼았던 이유가 궁금하다.

고산평야의 무장전 주인들은 공동으로 감시인을 두어 농경지를 관리하였다. 마을에서는 농경지 감시인을 캐초관이라 불렀다.

고광민 제주민속학자가 펴낸 ‘제주 생활사(2016년)’와 ‘고산향토지(2000년)’에 의하면, 고산평야의 캐초관이 하는 일은 마을에서 기르는 농우들과 특히 기러기와 두루미가 농경지에 무단침입 하는 것을 감시하고 막는 역할이다.

고려 말부터 조선 말기까지 이 지역에는 소와 말을 키우던 목장인 모동장이 들어서 있었다. 모동장이 위치했던 차귀벵뒤(고산평야) 둘레에는 경계용 담(캣담)이 구축되어 있었다.

이러한 목축과 농업문화의 영향으로 고산평야는 곡식을 배불리 먹으려는 철새와 이를 쫓으려는 캐초관 사이에 생존을 위한 각축장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철새들을 살펴야 하고 쫓아야 하는 캐초관에게는 돌담 없는 밭들이 오히려 좋은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고산평야 지대는 박힌 돌이 별로 없는 특이한 지형이다. 평균풍속에서도 성산포와 서귀포의 2배가 넘을 정도로 바람이 많은 이곳의 지형 특성상, 오히려 바람막이 돌담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장전이 고산평야에 많다는 것은 이곳만의 특별한 농업문화에서 기인하였으리라 여겨진다.

제주시 한경면 낙천리 아홉굿 공원. 노랑굴과 검은굴에서 쓸 흙을 파냈던 곳이 샘이 됐다.
제주시 한경면 낙천리 아홉굿 공원. 노랑굴과 검은굴에서 쓸 흙을 파냈던 곳이 샘이 됐다.

▲ 고산리와 신도리 경계에 있는 노랑굴과 낙천리의 아홉굿

제주선인들은 황토와 진흙으로 항아리와 허벅 등의 옹기그릇들을 만들어 왔다. 특히 흙과 물이 풍부한 이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도요지가 구축되어 토기를 생산해 냈다.

차귀현과 대정현에 소속된 마을들인 고산리·산양리·신도리·청수리·낙천리·구억리·신평리 등지에서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진흙을 이용하여 옹기를 생산했다. 고산리와 경계지점에 위치한 ‘신도리(3138번지) 도요지’는 제주도기념물 제5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도요지는 원형이 파손되어 일부 개축된 것이다. 굴의 길이는 8.8m, 너비 2.6m, 높이 1.6m이다. 마을에서는 도요지가 구축된 시기는 알 수 없다 하며 1960년대 말까지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 도요지는 서쪽이 낮고 동쪽이 높은 자연 경사면을 따라 만들어졌다. 이렇듯 도요지인 노랑굴과 검은굴은 평지가 아닌 완만한 경사면에 축조되었다.

이러한 이유로는 연기로 착색하는 기술과 관련이 깊다 한다. 두 마을 경계에 있는 도요지는 제주의 대표적인 노랑굴의 하나로, 일명 일곱르(칠전동) 노랑굴이라고도 한다.

고산리에는 노랑굴이 4개가 있었으나, 대부분 흔적만 남아 있다. 노랑굴은 그릇을 구울 때 온도 변화에 따른 자연 발색으로 그릇 표면이 노란색을 띠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고, 굴은 가마를 뜻하는 제주어이다.

특히 낙천리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흙은 여러 마을의 노랑굴과 검은굴의 원료로 쓰였다고 한다. 또한 불미(대장간) 작업이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다는 낙천리에서는, 흙을 파냈던 지형들이 오랜 시간이 흐르며 깊은 웅덩이가 되고 물이 고이는 샘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문화가 깃든 유산임을 홍보하기 위하여 낙천리에서는 ‘아홉굿 공원’을 마을 명소로 조성하였다. 굿은 샘을 뜻하는 지역어이다.

고산리와 신도리 경계에 있는 도요지 노랑굴.
고산리와 신도리 경계에 있는 도요지 노랑굴.

▲ 제주도 도요지의 역사문화

1487년(성종 18) 제주에 추쇄경차관으로 왔던 최부는, 그의 한시 탐라사(耽羅詞)에서 허벅을 등에 지고 물 길러가는 제주여인의 모습을 다음의 시로 표현하였다.

“… 허벅진 촌 아낙은 물 길러 가고(負甁村婦汲泉去) / 피리 부는 어린 목동 둑 쌓은 길로 돌아오네(橫笛堤兒牧馬歸) … .”

위 시에서의 병(甁)은 항아리, 즉 허벅으로 여겨진다. 최근까지도 허벅진 아낙은 제주여인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허벅을 머리에 얹거나 이는 모습 대신 등에 걸머지는 것은 머리를 경외하는 제주선인들의 사고가 반영된 풍속이자 편리성 때문이기도 하다. 이형상 목사가 펴낸 남환박물(1703년)에는 여자들이 목통(木桶)으로 물을 길러 날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제주도에서 1777년부터 9년여 유배생활을 한 조정철은 ‘정헌영해처감록’에서 ‘제주도 여자들은 식수를 큰 병(大甁)에 길어 바구니(竹筐)에 넣고 등에 지어 나른다.’라고 했다.

위 고서에 등장하는 큰 병은 허벅으로, 바구니는 물구덕으로 여겨진다. 이로 미뤄보면 제주선인들은 오래전 나무로 만든 물통도 항아리와 더불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위에서 소개한 최부가 신기하게 여겼던 허벅을 비롯한 제주의 옹기들은 돌가마에서 구워졌다. 다른 지역의 가마가 흙가마(土窯)인데 반하여 제주 지역의 가마는 돌가마(石窯)이다.

도자기사에서는 돌가마인 석요(石窯)에 관한 기록이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대한 연구가 이뤄진다면 제주도의 노랑굴과 검은굴은 세계 최초의 석요 도요지로 알려질 수도 있을 것이다.

허벅·물항·고소리 등의 그릇 표면이 노란색이나 적갈색을 띠는 제주의 옹기는, 유약을 칠하지 않고 순전히 불의 영향으로 발색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노랑굴에서는 1100℃ 이상에서, 검은굴은 900℃ 내외에서 구워냈다고 한다.

제주옹기 생산은 계를 결성해 공동으로 운영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개인 소유의 가마는 대부분 소멸되었으나, 계 형태로 운영된 가마는 고산리를 비롯한 여러 마을에 남아 있다. 특히 제주도기념물(제58-1,2호)로 지정된 구억리 노랑굴(721번지)과 검은굴(1055번지)은 자연지형을 활용해 만들어진 통가마로, 원형을 잘 보존된 도요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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