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 계몽·교육 기틀 마련 위해 혼신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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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관석, 위미국민학교 초대 교장…광복 후 道 학무과장 발탁
 이광빈, 만경현령 역임…영조 사후 충성심 담은 ‘달고사’ 전달
 이광수, 조천읍 출신…1784년 무과 급제한 후 선전관 등 지내
 이구성, 1738년 문과 합격해 전주 삼례찰방·병조정랑 등 거쳐
 이규서, 1885년 6월 제주판관에 도임한 후 다음해 3월에 떠나
 이금자, 한림읍 출신 일류 해녀…마라톤 선수 황영조의 어머니
제주도 유일한 미 군사시설이었던 미 제59군정중대의 항공 사진으로 1948년 5월 1일 촬영됐다. 이관석은 광복 후 미 군정청에서 제주도 학무과장으로 발탁됐다.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제주도 유일한 미 군사시설이었던 미 제59군정중대의 항공 사진으로 1948년 5월 1일 촬영됐다. 이관석은 광복 후 미 군정청에서 제주도 학무과장으로 발탁됐다.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이관석李琯石:1902(광무6)~1949, 교육자, 미 군정기의 제주도(道) 학무과장, 호는 남호(南湖), 본관은 전주.

이영하(李榮夏)의 장남으로 애월읍 애월리(하물-깍)에서 태어났다. 소설가 이시형(李蓍珩)의 친형이다.

1921년 3월 제주농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애월리의 청년회장으로서 신생활운동과 민중계몽운동에 헌신했다.

현경호(玄景昊)의 후임, 교장으로 부임해1949년 2월까지 반년 동안 재임했다. 1924년 애월교 교사로 출발해 1937년 소학교 교원 3종시험에 합격했다. 동년 12월 애월교 훈도로 발령, 다년간 국민학교 교사로 종사했다.

1939년 남원면 위미리에 위미국민학교가 설립됐을 때 초대 학교장으로 발령받아 학교 초창기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해 도내의 유수한 교육환경을 마련했다.

이런 일로 그의 경륜이 인정돼 1945년 해방이 되자 미(美) 군정청에서 제주도 학무과장으로 발탁됐다. 제주도 교육계의 총수가 된 셈이다.

1947년 3월 31일과 4월 1일 양일간에 걸쳐 제주도 산업국장 임관호(任琯鎬)를 위시해 학무과장 이관석, 인사과장 송인택(宋仁澤), 회계계장 강산염(姜山炎) 등 도 간부 10여 명이 검거됐다. 이는 3·1시위에 따른 공무원의 파업사태로 유발된 것이라고 한다.

한편 이관석 과장을 비롯한 도청 직원 7명과 민전(民戰) 간부 등은 계속해서 검찰당국의 취조를 받고 있었다. 동년 8월 공무원의 인사개편도 단행했다.

이는 도(道) 학무과장 이관석을 비롯해 과장 4명이 사직원을 제출하였기 때문이다. 유(柳)지사는 “사직을 권고하였다는 설(說)이 있는데?”라는 기자 질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임한 본인에게 물어 달라. 본관에게 묻는 것보다 사표를 제출한 과장에게 묻는 것이 훨씬 편리할 줄로 안다.”고 응답했다.

1946년 봄 남원면 위미·신례·하례 3개리민 일동에 의해 ‘남호(南湖) 이관석교장 송덕비’가 위미교 교정에 건립됐다.

비문은 해은(海隱) 오인성(吳仁聖)이 지었는데 “本校成績 南州屈指 增築延長 高想特異 莫重工事 有終有始 三里同心 萬人仰視 是誰之功 是誰之智 永取難忘 先生德義”(이 학교의 성적, 산남 으뜸이네 증축연장, 그 뜻 특이하오. 막중한 공사, 한결같소. 세 마을 합심하니, 뭇 사람이 우러러보오. 이 누구의 공인가! 누구의 슬기리오? 길이 못 잊겠네, 선생의 덕의를.) 라는 내용이었다.

이 비석은 4·3과 광복을 거치면서 수 10년 동안 땅 속에 묻혔었으나 남호(南湖)의 교육관과 업적이 재조명돼 1973년 당시 오남련(吳南連·위미) 교장은 비석을 파내어 현 위치에 다시 건립하였다.

▲이광빈李光彬:1734(영조10)~1801(순조1), 무신. 만경현령(縣令), 표류인, 자는 관지(觀之), 본관은 성주.

이정무(李廷茂)의 아들로 조천읍 북촌리(뒷-개)에서 태어났다. 그는 1765년(영조41) 고익보(高益普) 등 32명과 함께 무과에 급제, 만경현령(萬頃縣令)을 지냈다.

그의 아들 방익(邦翼)·방윤(邦潤)은 모두 무과에 급제했으며 방익은 중국에 표류됐다가 무사히 귀국해 임금을 배알한 바 있다.

1776년(영조52)에 영조가 돌아가시자 이정무는 아들 광빈(光彬)을 비롯한 제주인 몇 사람을 동반하고 상경, 대궐 앞에 이르러 사배)四拜) 조곡(弔哭)했으며 다시 능소(陵所)를 찾아 참배하고 능도감(陵都監)을 만나 전달한 글이 이 ‘달고사(達告辭)이다.

이 글을 지은 이정무는 영조 임금에 대한 충성을 지극하도록 글이 지배(紙背)에 흐르고 있다.

▲이광수李光秀:1761(영조37)~1837(헌종3), 무신. 선전관, 본관은 성주.

조천읍 북촌리(뒷-개)에서 이정무(李廷茂)의 아들로 태어났다.

만경현령(萬頃縣令) 이광빈(李光彬)의 아우이다. 이광수는 1784년(정조8)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선전관에 이르렀다.

또 1796년(정조20) 4월 2일 박사제(朴師悌)의 후임으로 명월만호에 임명돼 1798년 10월까지 재임했다.

▲이구성李九成:1702(숙종28)~1773(영조49) 영조 때의 문신, 전라도 삼례찰방, 전라도 정읍에서 객사, 예조좌랑(禮曹佐郞), 자는 자소(子韶), 본관 고부(벽동공파).

대정현(大靜縣)에서 이창무(李昌茂)의 큰아들로 회수리(도로-물)에서 태어났다.

1738년(영조14) 8월 제주순무어사 이도원(李度遠)이 내도, 과거시험을 개장해 그와 양덕하(梁德厦·명월), 이수군(李壽根·제주-성안) 등 3인을 문과에 시취(試取)했다.

그는 이듬해 전시(殿試) 문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벼슬은 제주교수 및 교서관 주부·판관·통례·예조좌랑·병조정랑 등을 거치고 외직(外職)으로 전라도 전주의 삼례찰방(參禮察訪)을 역임했다.

그의 손자 이태상(李兌祥·제주-성안)은 정조 때에 문과에 급제한 바 있다. 1739년(영조15)에 식년무과에 합격했다.

교서관 부정자, 승진을 거듭해 교서관 정자, 성균관 적적, 봉상시 주부, 동 판관, 성균관 사예 등 요직을 거쳐 통예원 우통례에 올라 정3품인 통정대부를 가자(加資)했다.

▲이규서李圭瑞:1852(철종3)~?, 제주판관, 조천읍 북촌리(뒷-개) 태생, 본관은 성주.

이시인(李時仁)의 아들, 부인은 파평윤씨 윤경화(尹京化)의 딸. 무과에 급제했다.

1885년(고종22) 6월, 제주판관 고경준(高景晙)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86년 3월에 떠났다.

▲이금자李錦子:생몰년 미상, 출가(出稼) 해녀, 국제적 마라톤 선수 황영조의 어머니, 본관 전주.

한림읍 협재리(섭지)에서 태어나 일류 잠수(潛嫂)였다.

허파의 기능이 뛰어나 물 속에서의 작업에는 그녀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동네 상잠녀(上潛女)들과 함께 강원도로 처녀 비바리 때에 품팔이 출가(出稼)를 떠났다.

강원도 삼척(三陟)바닷가 총각과 눈맞아 황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라토너 황영조(黃永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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