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역사 유랑, 제주을묘왜변과 치마돌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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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혜경, 제주연구원 책임연구원/ 논설위원

화북포구 일대에는 별도환해장성을 비롯하여, 별도연대, 화북진지, 큰이물, 해신사, 곤을동 환해장성 등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사연의 궤적이 쌓인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그래서 화북포구 일대를 걷고 있다 보면, 수많은 역사적 이야기들과 조우하게 되고, 제주사람들이 살아왔던 삶의 궤적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그 중의 하나는 제주을묘왜변 이야기다. 1592년에 발생한 임진왜란이 올해로 4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해서 이번 기회에 제주을묘왜변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임진·정유년의 왜란은 당시 조선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하여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에는 큰 변화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사회는 새로운 변혁과 질서에 놓이게 되었다. 이 왜란은 깊은 상처도 주었지만, 민·관이 협력하여 국가적 난국을 타개하였다는 자긍심을 심어준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왜란들이 일어나기 전 왜구는 끊임없이 서·남해 일대를 도발하였다. 이 지역에 존재하는 많은 읍성, 성곽, 봉수대 등 방어시설들이 왜구 침입과 관련 있다. 제주지역도 마찬가지로 왜구가 들끓는 지역 중의 하나였다. 그렇다면 당시 제주 사람들은 이 상황들을 어떻게 마주했을까?

1555년 을묘년 명종 시기에 제주와 전라남도 영암에서는 왜변이 있었다. 이 왜변은 제주을묘왜변이라고 불릴 만큼, 제주 전투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왜구들이 화북포로 들어와 제주목 주성을 둘러싸고 3일간 전투를 펼쳤는데, 당시 제주목사 김수문을 비롯하여 군사 70명과 치마(馳馬)돌격대 등이 승전(勝戰)을 하였다. 이 왜변은 임진왜란 전에 이미 민·관 협력으로 이루어진 승전이었다. 또한 중앙군이 도착하기 전에 지역민들이 주체적으로 나서서 이끈 승리였다. 이를 통해 왜변에 대응하였던 제주사람들의 적극적이고 용맹스런 면면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제주 성 안 남수구 터에는 1555년 그날 왜구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치마돌격대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제주목관아지 안 망경루는 을묘왜변 뒷 해인 1556년에 전공(戰功)에 대한 명종의 배려에 보답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이 망경루는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졌다가 1991년 제주목관아지 복원 사업으로 2006년 2월에 복원되었다. 우리의 주변 속에 역사는 이렇게 숨겨져 있다. 제주에서의 을묘왜변과 승전보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에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을 만큼 당시로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였다.

승전의 역사에 대한 기억과 기념의 반복은 한 사회가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 그 위기를 극복하는 중요한 정신적 힘이 되었기에 승전을 기념하는 일은 국가 및 사회공동체를 유지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어왔다. 그럼에도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지역사회의 경험과 사건은 들여다볼 기회가 많지 않았고, 제주을묘왜변의 승전과 치마돌격대의 역사에 대한 지역사의 관심도 많지 않았다.

제주 사람들의 용기와 패기, 도전 정신을 보여줄 수 있는 역사에 대한 접근은 사실 아쉬운 점이 많다. 제주을묘왜변의 승전사를 조명하는 것은 당시 왜변에 직면한 지역 구성원들의 대응을 통해 지역민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며, 자긍심과 연결되어 있다. 제주 역사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을묘왜변과 치마돌격대의 이야기를 다시 되살려 내보는 것은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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