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과 이름 나란히 새겨진 제주 유학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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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동, 학생 항일 활동…공산주의 조직 만들어 노동운동 전념
 이기순, 홍로성당 신도회장…日 징병제에 반대하다 체포 후 옥사
 이기온, 노사 기정진 문하서 학문 배워…전통 유가 가문의 자손 
 이기용, 오현단 ‘향현사유허비’ 글씨 주인…서당 개설해 훈학
 이기조, 추사의 제자이자 목사 앞에서도 절조 굽히지 않던 선비
 이기표, 혁명적 농민조합준비위 소속…항일운동으로 옥고 치러
면암 최익현의 ‘유한라산기’에는 최익현이 한라산을 등반할 때 이기온이 지로인의 역할을 했다고 나와 있다. 사진은 백록담에 남아 있는 마애명으로 이기온과 최익현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면암 최익현의 ‘유한라산기’에는 한라산을 등반할 때 이기온이 지로인 역할을 했다고 나와 있다. 사진은 백록담에 남아 있는 마애명으로 이기온과 최익현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이기동李琪同:1907(융희1)~?, 원적은 목포, 공산주의자동맹 항일 활동, 본관은 경주.

이보현(李甫賢)의 아들로 추자면 신양리(장-작지)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사립 중앙고보 제4학년 재학 때인 1927년 11월 5일 학생들이 맹휴(盟休)에 돌입, 이에 일경은 1·2차에 걸쳐 134명의 학생을 검거해 종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아 이기동 등 주동 학생 6명은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송치됐다.

1936년 3월 20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또 항일운동으로 1934년 12월 4일 이기동, 김정수(해남 출신) 등 7명을 송청, 이들의 주장은 첫째 학생 본위의 교육, 둘째 학생 자치권 부여 등이었다.

그 후 와세다(早稻田)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를 중퇴, 귀국해 목포에서 해산물 매매업 및 수송업에 종사했다.

1932년 4월 목포 북교동 50번지에 살면서 극비리에 공산주의 단체를 결성하고 조직부를 담당, 동년 8월 이 단체를 레닌주의자동맹으로 명명하고 1933년 3월 다시 공산주의동맹으로 개칭했다.

또 1934년 2월 ‘목포 노동조합 조직준비위원’이 돼 조사 사업 및 강령 등을 작성하던 중 해남(海南)경찰서 형사대에 의해 목포에서 동년 3월 18일에 동지 5명과 함께 체포당했다.

이들은 해남·영암·완도·장흥·강진 등지를 중심으로 농민 적화(赤化)운동과 목포 선박 하역 노동자를 기반으로 전남 노동자협의회를 조직해 5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기순李基淳:1902(광무6)~1942, 제주도 천주교 신도 및 신부 항일 활동, 본관은 고부(벽동공파).

산남 중문리(중-물)에서 태어나 홍로성당 소속, 천주교 신도회장을 맡아 아일랜드 사람인 서신부(徐神父)와 함께 ‘일본 패전’에 관한 시국담을 논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1938년 남제주 중문면사무소 서기(書記)로 재직, 일제가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해 한국인에게도 징병 제도를 실시하게 되자 그는 이를 교인에게 알리며 지원병 제도에 대해 반대 의사를 전달했다.

이러한 사실이 발각돼 동년 10월경 신부와 신자 35명을 구인해 조사하더니 그 역시 체포당한 후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해 재판 직전, 1942년 8월 21일 광주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정부에서는 1995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대륙 침략에 필요한 군수(軍需) 자원을 한반도에서 수탈하는 한편, 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이기온李基瑥:1834(순조34)~1886(고종23), 선비, 면암 최익현(崔益鉉)의 한라산 등반 시에 지로인(指路人), 자는 온옥(昷玉), 호는 귤당(橘堂), 본관은 경주.

제주시 오라동 연미 마을에서 이계수(李繼秀)의 아들로 태어났다. 진재(震齋) 이응호(李膺鎬)의 아버지이다. 그의 이름과 참판 최익현(崔益鉉)의 이름을 새긴 마애명이 백록담(白鹿潭)에 현재 남아 있다.

어릴 때부터 글을 좋아해 전통 유가의 환경에서 선비의 기질을 익힐 수 있었다. 이는 유배왔던 간옹(艮翁)의 8대손으로서 가문 대대로 문인들이 배출됐다.

국당(菊堂) 이중발(李重發)은 5대조이며 형 기조(基肇)와 아우 기용(基瑢)도 모두 일가견을 이룬 문사들이다. 이기온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유학의 진수를 배웠으며 1873년(고종 10)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제주에 유배됐을 때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면암의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에 보면 그는 등반 시 지로인으로서 역할을 다했다. 최익현과의 교유는 제주 교학 활동 가운데 의미있는 일이었으며 그러한 흔적으로 문연사(文淵社·연미마을)라는 유적을 남겼다.

1931년 만들어진 문연사는 양인의 유덕을 추모해 매년 정월 중순에 향사하던 제단으로서 현재까지 행해지고 있다. 문연사의 옛터에는 최익현이 몸소 식수한 나무가 고목이 됐으며 이기온이 최익현을 사모해 각석(刻石)한 ‘사장수포차배(師長樹抱且拜)’라는 글이 남아 있다.

이러한 문연사제(祭)와 같은 행사는 제주 유림들에게는 위대한 사표이자 각성의 상징이다. 그의 행장은 부해 안병택(安秉宅)이 기록했으며 비문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지었다.

이기용이 세운 문연서당 터로 제주MBC 건물 남쪽에 있다.
이기용이 세운 문연서당 터로 제주MBC 건물 남쪽에 있다.

▲이기용李基瑢:1840(헌종6)~1899(광무3), 선비, 서예가, 자는 도오(道吾), 호는 동곡(東谷), 본관은 경주, 문연서당(文淵書堂) 개설.

제주시 오라동(오라위)에서 태어났다. 이계수(李繼秀)의 아들, 귤당(橘堂) 이기온(李基瑥)의 아우이다. 이기용은 서예로 이름이 알려졌다.

오현단에 세워진 ‘향현사유허비(鄕賢祠遺墟碑)’는 그의 글씨이며 글은 영운(靈雲) 고경준(高景晙)이 지었다.

이기온은 면암 최익현(崔益鉉)과 교유로 유명해졌고, 특히 문연서당(文淵書堂)을 개설, 훈학에 열의를 바쳤다.

또 형 이기조(李基肇)는 재주가 넘쳐 추사(秋史) 김정희와 교유로 시문을 익히더니 2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기조李基肇:1826(순조26)~?, 헌종 때의 선비, 추사(秋史)와 교유해 시문을 익혔다. 본관은 경주.

제주시 오라리(오라위)에서 태어났다.

추사 김정희에게 시를 배우며 동배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당시 제주목사 이의식(李宜植)과 만나 논의하더니 맞지 않아도 절조를 굽히지 않았다. 20세에 바다 건너 싸움터로 나갔다. 큰 소리로 제(齊)나라의 형경(荊卿)을 부르면서 술을 퍼붓고 마셔 왜구와는 함께 있을 수 없다고 떠난 후 종무소식이었다.

▲이기표李起杓:1911(일제강점기)~?, 일명 이기일(李起日), 본관은 전주, ‘제주도 혁명적 농민조합준비위원회’의 항일 활동, 말년에 일본 거주한 재일교포.

이경성(李庚成)의 차남으로 조천읍 신촌리(숙군)에서 태어났다.

1929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각종 공장 일에 종사하더니 1930년 7월 귀향해 동향의 공산주의 항일운동가 이좌구(李佐九), 신갑범(愼甲範·일명 동옥) 기타 사회주의자와 교류하고 동지로 결속됐다.

항일운동으로 1937년 4월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일본에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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