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을 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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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완연한 봄이다. 지친 삶을 위로하듯 봄볕이 따사롭다. 잠시 마당에서 서성이는데도 슬며시 우울감이 떠나는 느낌이다. 생동하는 봄기운이 힘을 내라 한다.

조그만 화분 속에서 한뎃잠을 견뎌낸 분재가 파릇파릇 움을 틔우고 있다. 아기의 옹알이처럼 무슨 말을 하는 듯하다. 분갈이를 소망하는 눈빛은 아닌지 살핀다. 시간의 율동 속에서 기지개 켜는 모습을 거저 즐길 심산은 아니다. 땅의 습성에 젖은 손이 바지런을 떨어야겠다.

자연의 위대함은 조화로움에 있을 성싶다. 완전히 한쪽으로만 기울지 않는다. 설중매는 피고 진 지 오래지만, 느릅나무 배롱나무 푸조나무 들은 감각이 마비됐을까 아니면 아직도 느긋하게 겨울잠을 즐기는 걸까 움틀 기미가 안 보인다. 곁눈질하지 않고 자기 기준으로 살아가라고 역설하는 자태다.

지난달 초 아내와 저녁 산책 때의 일이다. 동네 어귀에 족히 천 평은 될 무밭에서 서너 사람이 무를 줍고 있었다. 주인이 수확한 후라 가져가도 된다기에 밭으로 들어섰다. 어림하여 5분의 1도 상품으로 수확하지 못하고 패대기친 모습이 안쓰러웠다.

뿌리 쪽이 갈라지거나 몸통이 작은 것, 옆구리에 골이 생기거나 동해를 입은 것은 물론 상품으로 충분한 것도 뽑고 던지면서 여기저기 금이 간 것들도 있었다. 우리는 양손에 하나씩 들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가 맛을 본다. 맛있는 무라며 다시 가서 한 포대 넣고 와 무말랭이를 만들었지만, 왠지 마음이 무거웠다. 올해 월동채소 값이 폭락으로 인건비도 건지지 못한 농민들의 시름이 떠올라서다.

며칠 전 날씨는 여름이 기습한 듯 유난히 기온이 올랐다. 춥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그날엔 두꺼운 내의를 벗어버렸다. 따뜻한 날씨에도 발목과 발등은 냉증으로 시리고 아리다. 몇 가지 검사를 해도 해결책이 쉽지 않다. 어쩔 것인가, 발을 잘라버릴 수는 없는 일이라 동행할 수밖에. 삶도 뜻대로 안 된다고 부글부글 속앓이만 하느니 때론 꼭 안아주는 게 어떨까 한다.

오랜만에 오일장을 찾았다. 주말인데도 예전처럼 붐비지 않았다. 꽃가게에 들러 봉오리를 내민 튤립 세 개와 백합 구근 하나 그리고 목단 한 그루 사고 집으로 향했다. 제주시보건소 옆을 지날 때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검사를 받으려는 사람이리라. 요즘 안전문자에 실려 오는 제주의 오미크론 확진자 수가 너무 가파르다. 6000명을 넘어선 날도 있다. 언제쯤 수그러들까. 독감처럼 견디며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현대의학을 응원하며 묵묵히 기다린다.

나이 드는 탓일까,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두 번은 없다>란 시를 종종 읽는다. 그 날이 그날 같아도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지 않은가.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이 구절을 읽으며 과거의 틀에 가두어 새로움을 놓치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히아신스는 퇴화하는 구근이라는데 땅속에 그대로 두어도 3월이면 꽃을 피운다. 보라와 하얀 꽃이 세상을 향해 환호한다. 꽃을 보며 화내는 사람은 없을 테다. 꽃을 심는 하나의 이유다.

봄엔 소망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 결실은 나중의 문제다. 오늘을 거치며 이별에 이른다. 시간의 섭리를 거역할 순 없다. 봄기운에 싸여 포기하지 않는 파도처럼 소박한 소망을 향해 나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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