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리 바닷가에 남겨진 일제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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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해안참호·임형수 숭모원
미국 군함 감시·포격 위해
바닷가 바위 사이 파헤쳐

사화로 희생된 임형수 목사
평택임씨 입도조 임구 묘역에
탄생 500주년 기념해 명명
일제가 서귀포시 대정읍 영락리 해안에 구축한 해안참호. 이곳의 해안참호는 길쭉한 바닷가 바위를 엄폐 내지는 보호벽으로 삼아, 그 반대쪽 바위 밑에 깊이와 폭 1m, 길이 수십 m 정도로 파헤쳐 만들어졌다.
일제가 서귀포시 대정읍 영락리 해안에 구축한 해안참호. 이곳의 해안참호는 길쭉한 바닷가 바위를 엄폐 내지는 보호벽으로 삼아, 그 반대쪽 바위 밑에 깊이와 폭 1m, 길이 수십 m 정도로 파헤쳐 만들어졌다.

▲영락리 바닷가에 일제가 파헤친 해안참호와 갱도진지

바닷가 마을 용수리는 당산봉·수월봉·차귀도의 북동쪽에 있고, 해안참호와 갱도진지가 있는 영락리는 그 남서쪽에 있다. ‘덕자리돔’이라는 마을축제가 열리는 영락리 바닷가에는 특히, 1945년 초 일제가 파헤쳐 놓은 참호 흔적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수심이 깊은 ‘목저문여덕과 전세비덕’이란 바닷가 사이에 있는 해안참호는 일제가 한경면 고산리 해안과 대정읍 송악산 해안에 구축한 ‘결7호 특공진지’의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일제는 이 중간지점을 고산과 대정 양쪽의 특공진지로 향하는 미군의 전함을 감시하거나 포격할 수 있는 지형으로 여겨, 이 일대에 해안참호와 갱도진지를 구축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곳의 해안참호는 길쭉한 바닷가 바위를 엄폐 내지는 보호벽으로 삼아, 그 반대쪽 바위 밑에 깊이와 폭 1m, 길이 수십 m 정도로 파헤쳐 만들어졌다. 일제는 또한 영락리 바닷가 근처에 있는 돈두악 오름에도 여러 갱도진지를 구축하였다.

해안참호와 갱도진지를 안내한 영락리 출신 송한진(1950년 생) 님은 어릴 적 돈두악 정상 주변에 있던 지하갱도에도 동무들과 어울려 수차례 들어갔다고 한다. 흙 등으로 입구가 메워져 있는 지역을 안내한 송씨는 시간이 흐를수록 갱도진지의 흔적이 지워지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돈두악 일대는 조선시대에는 마소 목장인 모동장(毛洞場)이 있던 곳이다. 지금도 영락리에서는 이 일대를, 나무 울타리로 둘러친 목장의 입구를 뜻하는 ‘살채(寨)기도’라고 부른다.

최근까지도 중장년층은 ‘모간(목안)에 간다.’라는 표현도 곧잘 사용했다고 한다. 모간에 간다 함은, 대정현에 속한 영락리 사람들이 제주목에 속한 고산리에 간다는 의미이다.

제74대 제주목사 금호 임형수 숭모원. 임형수 제주목사 탄생 500주년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입도조인 임구의 묘역 일대를 성역화해 이름 붙였다.
제74대 제주목사 금호 임형수 숭모원. 임형수 제주목사 탄생 500주년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입도조인 임구의 묘역 일대를 성역화해 이름 붙였다.

▲당산봉에 조성된 제74대 제주목사 임형수 숭모원을 찾아서

다양한 역사문화를 품은 용수리와 당산봉을 수차례 답사하러 다니며 자주 본 안내표석이 ‘제74대 제주목사 금호 임형수 숭모원’이다.

286명의 제주목사 중 누구도 제주에 묻혀있지는 않지만, 어쩌면 이곳과 깊은 관련이 있으리라 여긴 필자는, 지역 해설사인 현원호 님의 안내로 위의 숭모원을 찾았다.

그곳은 평택임씨 제주입도조를 모신 묘역이었고, 제74대 제주목사 임형수는 평택임씨 입도조인 임구의 부친이었다. 그리고 ‘숭모원’은 임형수(1514-1547) 제주목사 탄생 500주년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입도조인 임구의 묘역 일대를 성역화 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임형수 목사를 찾아가는 길은 권력남용으로 점철된 역사문화를 만나기도 하는, 슬프지만 다시 기억해야할 소중한 역사의 길이었다.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 호가 금호인 임형수는, 1545년(인종1) 문정왕후의 오라비이자 소윤인 윤형원 등이 벌인 을사사화로, 홍문관 부제학에서 좌천되어 제주목사로 부임하나 다음해 파직된다.

이어 2년 뒤에는 양재역 벽사사건(정미사화)의 모함으로, 소윤 윤형원 일파에게 대윤 윤임의 일당으로 몰려 문정왕후에 의해 사사되니, 그의 나이 34세였다.

죽음 직전 임형수가 아들에게 ‘배우지 아니하면 무식하니, 배우기는 하되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라고 말하고는, 짐주(鴆酒)인 사약을 여러 번 마셨으나 죽지 않자 손수 목매 자결한다. 교류하던 퇴계 이황은 그의 억울한 죽음을 몹시 슬퍼하고. 사후 20년이 지난 1567년(명종22) 신원된 임형수는 1868년 이조판서로 증직된다.

제주에서도 명환(名宦)으로 알려진 임형수는 1702년 전남 나주의 송제서원과, 1850년 장인식 제주목사에 의해 ‘귤림서원 사당이던 영혜사’에 배향된다.

임형수 제주목사는 송사를 엄정하게 행하고 민폐를 없애려 하였으며, 특히 교육기관인 동재인 김녕정사와 서재인 월계정사를 설립하였다.(제주에서 가장 먼저 들어선 사설교육기관은 1534년 심연원 목사가 세운 향학당이다.)

생전에 아국(我國)18현으로 알려진 이황과 김인후 등과 친교를 맺은 임형수 목사는 깊은 사색으로 엮은 ‘금호유고’를 남겼으며, 유고에는 제주와 관련된 여러 글도 실려 있다.

 

 

제주목사를 지낸 임형수의 시문집 ‘금호유고’ 중 제주 관련 시.
제주목사를 지낸 임형수의 시문집 ‘금호유고’ 중 제주 관련 시.

“나라 명을 받고 온 절제사는…
풍광이 아름다워 머물렀을 뿐”

임형수 목사의 시(時)

임형수 제주목사와 관련된 글은 조선왕조실록, 허균의 학산초담, 이수광의 지봉유설 등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다. 관덕정(觀德亭 濟州)이란 제목으로 지은 시를 감상하자.

“어려서부터 글과 덕을 쌓고 병법도 논하며(曾修文德又論兵) / 백성의 아픔과 기쁨에 정 붙여 깊이 생각 하였네(長念民間苦樂情) / 송사를 들을 때 늘 공자님 말씀 품고(聽訟常懷夫子語) / 법을 다스릴 때는 백이의 청아함을 본 받는다네(典形每效伯夷淸) / 사람의 재주를 알려하면 말 타기와 활쏘기를 살피고(觀人才否御帿處) / 정사의 올바름과 사악함을 심판할 때면 현의 어울림처럼 양편의 소리를 듣는다네.(審政正邪絃管聲) / 우뚝 솟은 정자(관덕정)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突兀高亭今古在) / (제주백성들은) 몇 번이나 어진 목사 만나 좋은 세상 만났을꼬.(幾經仁牧享治平).”

다음은 용두암 바닷가를 읊은 용두석기(龍頭石磯)이란 시이다.

“고요한 굴속에 용이 엎드린 채 머리를 치켜드니(幽窟龍蟠爲擧頭) / 멋스러움에 빠져든 탐라의 절제사는 풍류가 좋아지네(應耽節制好風流) / 푸른 파도 위로 해 저물어 가니 새로운 흥이 나고(蒼波日落生新興) / 술잔 가득 푸른 술 부어 오랜 수심 씻어내네(綠酒杯深蕩舊愁) / 오래된 모흥혈에 만고의 구름 끼어 있고(穴老毛興雲萬古) / 여울지는 한두기(皇瀆)엔 천년 세월 건너온 달 비치네(灘鳴皇瀆月千秋) / 나라의 명을 받고 온 절제사는 마시고 또 마시려 하지만(使君不是流連飮) /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조금 머물렀을 뿐이라네.(爲惜風光却少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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