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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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오랜만에 대청소다. 거실 절반쯤 드러누운 햇살에, 부옇게 부유하는 먼지가 신경에 거슬렸다. 새달을 맞으려면 묵은 먼지는 말끔하게 털어내야겠다. 이참에 내 머릿속 복잡한 생각도 훌훌 털고 가야 할 것 같아 서둘렀다.

남편 책상은 늘 단정하다. 책꽂이에는 가지런히 정리된 책과 사전류, 색색의 볼펜이 통 속에 가득하다. 노트북 옆엔 조그마한 검은색 지갑이 정물로 자리했다. 전에 명함을 넣었던 것으로, 지금은 두툼하고 부피 큰 지갑을 대신해 쓰고 있다. 현금으로 채울 필요가 없는 간편 시대로 제격이다.

속에는 신분증과 신용카드, 황금빛 지폐 한 장쯤 고이 접혀 있을 빤 한 속내다. 사용처도 환한 남편의 용돈이다. 한때 지갑 안에 명함과 현금이 들어가, 양복 안주머니가 불룩 불거지던 시절도 있었다. 현금을 주로 쓰던 시절이다. 이제는 신용카드 한 장이면 간편하게 결제가 돼, 지폐는 시대에서 뒤처진 것처럼 인식이 된다.

남자는 새로운 사람과 명함을 정중하게 주고받으며 안면을 튼다. 사회에서 명함은 그 사람의 얼굴이요, 소속 단체의 직책을 대변한다. 그때는 남편이 지갑이 비었다 하면, 말없이 내어 주며 사용처를 묻지 않았다. 아침부터 싫은 소리 하기도 그렇고 달라질 것도 아니니까. 사무실이 교통의 중심지에 있어 사랑방 같아 지인들이 노상 들락거렸다. 주머니 사정은 걸핏하면 비었고, 자정 가까이 들어와 몽롱한 정신에 지갑을 빼 화장대 위에 놓곤 했다.

아침에 나갈 때는 두둑하게 나갔는데 저녁에는 번번이 빈 지갑이라니. 속이 부글거렸지만, 잠든 얼굴을 향해 눈 한번 흘기는 게 전부였다. 몇 장 확 빼버릴까. 유혹으로 잠깐 갈등이 일었지만, 열어 보거나 손대지 않았다. 지갑 속은 남편의 자존심이고, 열어 보지 않는 것도 내 자존심이라 생각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부부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고 여겼다

이제는 외출한 일이 생기면 먼저 지갑 사정부터 묻는다. 밖에 나가 기죽지 않으려면, 지갑을 열어야 어른으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며. 하지만 두둑하게 채워 밖으로 나가고 싶어도 마땅히 갈 곳도 없고, 만날 친구도 별로 없다. 돈이 있어도 딱히 쓸 일 없는 노년의 삶, 어느새 행동반경이 좁아졌고 주위가 비어가는 현실이다. 머리만 반백으로 변하는 즈음인 줄 알았는데, 주름이 깊어가는 모습에 하릴없이 측은하다. 차라리 밖으로 돌던 때가 그리운 건 피차 마찬가지리라.

평생 나만의 지갑을 가져보지 못했다. 지갑은 늘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 비면 빈 대로 채우면 채운대로, 물 흐르듯 빠져나가는 게 내 지갑의 몫이자 역할이었다.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동창 모임에서다. 부부 각각의 비자금 얘기가 나왔다. 서로 딴 주머니 찬다는 얘기가 충격이었다. 몇십 년 결혼생활에 내 몫도 없이, 자신을 홀대하고 산 게 아닌가 깊은 자괴감이 들었다.

내 삶에 종종 의문 품어 묻곤 한다. 이게 온당한지를. 늘 비었던 지갑,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해준 것 없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늦었지만 늘그막 삶에 든든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남편일까. 자식일까. 아니면 딴 주머니는 아닐까.

답을 알 수 없는 게 삶이다. 짐을 내려놓을 시기에 무엇을 또 짊어진다는 게 옳은 건지. 크게 불만족스럽게 산 건 아니지만, 아쉬움도 평생 동반자다. 가장 귀한 재산이 건강인데, 쓸데없는 욕심부리지 말자고 스스로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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