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유해 몰라 서러워”…제주4·3 집단학살터 ‘다랑쉬굴’의 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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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연구소, 다랑쉬굴 발굴 30년 증언본풀이 마당 개최

제주4·3 당시 집단 학살 터였던 다랑쉬굴 발굴 30년을 맞아 74년 전 4·3 광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겪은 공포와 아픈 기억을 가슴속에 묻고 살아가는 다랑쉬굴 희생자 유족들의 못다 한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마련됐다.

㈔제주4·3연구소는 31일 오후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다랑쉬굴 발굴 30년 ‘아! 다랑쉬, 굴 밖 30년이우다”라는 주제로 제주4·3 제74주년 증언본풀이 마당을 열었다.  

다랑쉬굴 희생자 유족인 함복순씨와 고관선씨, 이공수씨(사진 왼쪽부터).
다랑쉬굴 희생자 유족인 함복순씨와 고관선씨, 이공수씨(사진 왼쪽부터).

이 자리에서는 1992년 아이 1명과 여성 3명을 포함한 유해 11구가 발견된 제주4·3 당시 집달 학살 터인 다랑쉬굴 희생자 유족 함복순씨(79)와 고관선씨(75), 이공수씨(85)의 생생한 증언이 이어졌다.

첫 번째 증언자로 나선 함복순씨는 다랑쉬굴 희생자 함명립씨(4·3 당시 20세)의 여동생이다.

함씨는 “어느 날부터 밤마다 집에 사람이 찾아왔다. 어머니는 초가집 지붕 속에 오빠를 숨겼고, 나에게 어디 가서 오빠가 있는 곳을 말하지 말라고 했다”며 “하지만 이후 누가 와서 데려갔는지 오빠가 사라졌고, 어머니가 오빠를 찾아 헤맸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함씨는 “세화지서에 끌려간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내라고 했다가 모진 구타를 당해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1948년 12월 상도리 연두망에서 대살당했다”고 했다. 

함씨는 “다랑쉬에 가서 나무도 하고, 고사리도 꺾었지만, 그곳에 오빠 시체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며 “다랑쉬굴 유해 중 오빠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유해 중 누가 오빠인지 몰라 서럽게 울었다. 뼛가루 한 줌 남기지 못했지만, 비석으로나마 오빠를 기억한다”고 말했다.  

두 번째 증언자 고관선씨는 다랑쉬굴 희생자인 고태원씨(4·3 당시 26세) 아들이다.

고씨는 “아버지, 어머니가 해녀 벌이로 완도에 있을 때 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완도에 있다 고향에 볼 일이 있다면서 제주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는 제주에 있을 때 마을에서 청년단 활동을 많이 했다. 아버지와 마을 청년들은 4·3으로 시국이 어수선해지자 마을에 있으면 다 죽겠다 해서 산으로 올라갔다”며 “아버지가 도피하자 할아버지와 할머니, 삼촌은 도피자 가족으로 1948년 12월 종달리 공회당에서 대살당했다”고 했다.

고씨는 “나는 폭도 자식이라는 멸시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연좌제로 중학교를 마친 뒤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터를 잡고 생활했다”며 “이후 1992년 신문을 통해 다랑쉬굴에서 아버지 유해가 발견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버지 유해를 땅에 묻을 뼛가루 한 줌 남기지 못하고 바다에 뿌렸는데, 화장을 한 것이 가장 후회된다”고 토로했다.

마지막 증언자인 이공수씨는 다랑쉬굴 희생자 5명의 친족이다.

이씨는 “4·3이 하도초 3학년 때 일어났고, 무장대 습격으로 학교가 불에 탔다”며 “하도리를 폭도 마을이라고 하며 세화리 청년들이 하도 청년들의 손바닥을 피 터지도록 때리는 것도 목격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다랑쉬굴 유해 발굴 소식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됐고, 장례식에는 가지 못했다”며 “이제라도 다랑쉬굴 부근에 희생자를 위로하는 비석이라고 세워주길 바라고 있다”고 했다.

한편 1992년 4월 다랑쉬굴에서 아이 1명과 여성 3명을 포함한 11명의 유해가 발굴됐다.

유해 주변에는 솥과 항아리, 질그릇, 물허벅 등 생활용품이 함께 발견돼 좁은 굴속에서 학살을 피해 숨어 지냈던 힘없는 양민들의 참상을 보여줬다.

다랑쉬굴 희생자 유족들은 4·3 이후 40여 년이 지난 뒤에야 그토록 찾던 가족을 주검으로나마 다시 만날 수 있었지만, 수습된 유해들은 유족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화장돼 바다에 뿌려졌다.

당시 정부는 다랑쉬굴 유해 발굴로 회적 파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 희생자들의 유해를 화장해 바다에 뿌리기로 결정했고, 당시 북제주군은 유해만 수습해서 화장한 뒤 굴 입구를 콘크리트로 막아버렸다.

이후 뒤늦게 다랑쉬굴의 참상을 소개한 안내판이 세워지기는 했으나 유해 발굴 30년이 넘도록 비석 하나 없는 상태로 세상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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