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운 세상 피해 제주도 온 선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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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임씨·지씨·이씨 입도의 역사
문정왕후에 사사된 임형수
아들 임구 현감 당산봉 묻혀
지영걸·이세번의 후예와 
의형제 맺고 제주로 이주
임씨·지씨·이씨 입도조돼
수월봉에서 바라본 당산봉 주변 풍경. 을사사화로 홍문관 부제학에서 좌천되어 제주목사로 부임한 임형수는 제주 도처 순력에 나서고 특히 대정현 소속의 당산봉과 수월봉 일대를 안식(安息)을 누릴만한 옥토인 ‘남야광지(南野廣地)’로 여겼고, 부친의 유훈에 따라 임형수의 아들인 임구는 제주로 이주했다. 

제주목사 임형수에게 사약 내린 문정왕후 시대 엿보기

다음은 1614년 이수광이 펴낸 지봉유설(조선 백과사전의 효시)’에 실린 내용이다.

문정왕후 오라비이자 소윤의 실세인 윤원형이 임형수를 일파로 삼으려 마련한 술자리에서어서 드시지요. 부제학하고 권하니, 두주불사형인 임형수는 공께서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마다않고 마시리다.’라고 일갈한다. 이 사건으로 인종의 능역(陵役)을 맡고 있던 임형수는 제주목사로 좌천된다. 조선 27명의 왕 중 가장 짧게 재임한 인종은 문정왕후가 독살하였다 전해지는 불운한 왕이다. 다음은 임형수가 인종 임금에게 바치는 만시(輓詩)이다.

하늘이 글하는 이 몸을 없애려 하니 / 신이 어찌하여 이런 때를 만났는지 애답기 그지없습니다. / 차마 오늘의 눈물을 오래된 수건으로 적십니다. / 평생의 뜻을 본받아 보은을 갚고자 하나 / 울부짖을 뿐 죽지 못한 몸이 되었습니다. / 산릉의 준공을 보지 못한 채 / 남쪽 나라(제주)로 자리 옮김에 마음 아파할 뿐입니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일어난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의 두 번째 비인 장경왕후 윤씨는 인종을 낳고 25세에 승하하고, 세 번째 비인 문정왕후 윤씨는 아들인 명종(재위 1545~1567)을 허수아비 왕으로 만들며 조선의 측천무후가 되어 간다.

1544년 승하한 중종을 이은 인종이 8개월여 만에 승하하니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이 12살에 조선의 13대 왕으로 즉위한다. 소윤 윤형원 일파는 수렴청정한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을사사화와 정미사화를 일으켜 대윤일파와 사림세력을 제거하고 국고보다 더 많은 재산을 불리는 전횡을 일삼는다.

기녀 출신 정난정은 윤원형의 첩에 이어 정경부인까지 오르고, 윤원형의 본처도 독살한다. 승려 보우를 병조판서에 임명하는 등의 권력을 전횡하던 문정왕후가 1565(명종 20) 죽으니, 보우는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타살당하고, 윤원형과 정난정도 경기도 강음현에 유배된 후 자결한다.

평택임씨 입도조 정산현감 임구의 묘비.

임형수의 큰아들인 정산현감 임구가 당산봉에 묻힌 사연

다음은 평택임씨 종친회보와 비문 등에 의거한 내용이다.

을사사화로 홍문관 부제학에서 좌천되어 제주목사로 부임한 임형수는 제주 도처 순력에 나서고 특히 대정현 소속의 당산봉과 수월봉 일대를 안식(安息)을 누릴 만한 옥토인 남야광지(南野廣地)’로 여긴다. 1년 뒤 파직된 임형수는 정미사화(양재역 벽사사건)로 인해 사사되나 죽음 직전 평소 생각하던 바를 가족에게 유훈으로 남긴다. 사화 여파를 피해 가족들이 전라도 장흥에 숨어 살던 중 임형수 목사가 신원되고 그 영향으로 큰아들 임구(1540~1613)1578(선조 11) 충청도 정산현감으로 부임한다. 임구 현감은 이내 목불지서(目不知書) 즉 글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해직당한다.

선친의 유훈에 따라 임구는 동생과 아들을 장흥에 남겨두고 손자와 함께 제주로 건너온다. 숭모원 비문에는 1608년 의금부도사 이세번(고부이씨 입도조)과 첨절제사 지영걸(충주지씨 입도조)과 함께 제주로 이주해 입도조가 되고 161374세로 졸했다고 적혀 있다. 세 가문을 비롯한 대정현 일대에서는 이세번의 후예와 지영걸, 임구 세 집안이 의기투합해 의형제를 결의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비문에 쓰인 이세번은, 이세번의 후예로 수정 또는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이세번은 을사사화(1545)보다 먼저 일어난 기묘사화(1519)1520년 제주에 유배되었기 때문이다.

충주 지씨 입도조 지영걸 묘.

충주지씨 제주 입도조 지영걸

남제주문화지(2007)에 의하면, 경산도 영천 출신인 지영걸(1537~1646)은 무과 장원급제에 이어 문과에도 장원급제해 벼슬길에 나선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 첨절제사의 중책을 맡던 지영걸은, 군을 정예화하고 군량미를 비축하자는 진언이 상부에 의해 사욕을 챙긴다는 모함을 받자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한다. 부인을 잃은 지영걸이 자연과 벗하며 유람하던 중에 들린 강화도에서 앞서 소개한 임씨와 이씨를 만나 의형제를 맺고는 1594년 제주에 입도했다 전한다.

이후 제주에서 새로운 가정을 일군 지영걸은 제주 전역을 돌아보고 지세 좋은 곳을 찾아다니다 고산리를 거쳐 인근 마을인 감산리에 정착한다. 이후 의형제를 결의한 세 사람은 사망 순으로 유택을 정하기로 하는데 풍수지리에 남다른 재질과 식견을 지녔던 지영걸은 사후 유택의 제1명당지로 고산리 신물 지경을, 2명당지로 고산리 당산봉을 선정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하듯 고부이씨 입도조인 이세번의 묘와 평택임씨 입도조인 임구의 묘는 대정현 고산리, 110세까지 장수한 충주지씨 입도조인 지영걸의 묘는 대정현 감산리에 있다. 참고로, 1786년 제주목 우면을 신우면(애월)과 구우면(한림·한경)으로 나눌 때 대정현 우면에 속했던 고산지역은 대정현에서 분할해 제주목 구우면으로 편입되었다.

고부이씨 입도조 이세번 묘.

기묘사화로 제주에 유배된 고부이씨 입도조 이세번

1520년 충암 김정과 백산 이세번이 제주에 유배되고 충암 김정은 다음해 제주에서 사약을 받고 절명한다. 조광조 등 여러 선비들이 투옥되고 유배되자 의금부도사로 있던 이세번(1482~1526)은 그들의 무죄를 탄원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로 인해 이세번은 조광조 일파로 몰려 제주에 유배된다.

신도포구(둔포)로 들어와 대정현에서 유배생활을 한 이세번은 흥학에 힘쓴다. 이세번이 병으로 죽자 가족들도 대정현에 정착하여 삶을 이어간다. 1544(인종1) 이세번은 조광조, 김정 등과 함께 복권되고 대정향정이던 이충현(이세번 아들)이 제주교수로 천거된 이후 후손들은 대대로 대정향교의 훈도를 역임하기도 하며 고부이씨 일가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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