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은 희생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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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시인/4·3조사연구원

고구마만 보면 가슴이 메어온다는 사람이 있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고구마를 손에 꼭 쥐어주고는 토벌대를 피해 달아난 지 70여 년이 지났지만 그 고구마가 아버지의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며 지금도 고구마만 보면 가슴이 저리다고 하신다.

후다닥 아버지 나가시는 길로 뒤따르던 총소리에 영문 모른 어머니는 다섯 살 아들 손을 잡고 뛰었다. 솔밭 기어 산등성이 올라 꼭꼭 숨었다가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자기 집에 도둑처럼 들어가 먹을 것 입을 것을 챙기곤 다시 산으로 가서 숨었다. 오르고 내리고 오르고 내리고 몇 달을 그리 살다보니 산이 집 같았다. 그게 오름이란 걸 커서야 알았다.

그 다섯 살 아들이 팔순 노인이 되어 말한다. 산사람이 폭도라면 우리도 폭도였다고. 폭도가 빨갱이라면 우리도 빨갱이라고. 어느 날 군인에게 잡혀 학교에 갇혔다. 예쁘기로 소문난 고모는 어디론가 끌려갔다.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풀려나 고모와 아버지를 찾아 산을 헤매다 토벌대 총에 어머니가 꼬꾸라졌다. 10년 넘게 옆구리에 총알을 박고 살아야 했던 어머니는 ‘명 긴 게 벌이다’ 고 살아생전 한탄하셨다.

행방 모르던 아버지 소식은 마포형무소 소인을 달고 엽서로 왔지만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정뜨르 비행장에서 제 손으로 구덩이를 파라고 한 다음 총 쏘아 죽였다고 했다. 훗날 안 거지만 작은아버지는 거기서 그렇게 죽었다고 한다. 찾지 못하던 예쁜 고모, 현해탄 건너 북한에 살고 있다며 조사할 게 있다고 경찰이 불렀다. 진술서를 썼다. 온몸을 옭죄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겁이 났다. 스스로 국가에 충성한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군 입대를 했다. 살기 위해 군 입대를 한 것이다.

군 생활 마친 후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너무 기뻤다. 그러나 면접에서 떨어졌다. 세무서 시험에도 합격했다. 또 면접에서 떨어졌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면사무소 임시직에서도 한 달 만에 잘렸다. 수도요금 징수원에서도 잘렸다. 취직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안 되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결국 취업을 포기했다. 사업을 했다. 쫄딱 망했다. 다시 고향으로 갔다. 농사라도 지어야 먹고 사는데 덜컥 심장병이 생겨 농사도 지을 수 없게 되었다. 아내마저도 떠나버렸다.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의 진실규명으로 한국전쟁으로 억울한 희생자에 대해 대법원은 2012년 8·4·8·4원칙을 제시, 희생자 본인 8000만 원, 배우자 4000만 원, 부모, 자녀 800만 원, 형제, 자매 400만 원 등 평균 1억3000만 원을 배상 판결을 했다. 특히 2021년 10월 8일 제주지방법원은 4·3국가배상소송에서 희생자 본인 1억 원, 배우자 5000만 원, 자녀에게 1000만 원씩, 모두 1억6000만 원을 각각 지급하라는 판결을 했다.

이처럼 국가 폭력에 의한 피해는 희생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온가족의 문제임을 사법부도 명명백백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보상과 특별재심이 주요골자인 4·3특별법 보상금은 피해자 본인에게만 한정하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4·3은 희생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4·3은 희생자와 온 가족의 문제인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4·3 당시 죽지도 못하고 살아남아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가족에게는 단 한 푼도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4·3특별법은 반드시 다시 개정돼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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