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 속에서
봄볕 속에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정복언, 시인·수필가

완연한 봄이다. 앙상했던 나뭇가지가 두툼하게 푸른 옷을 입는가 하면 늦둥이들도 앙증맞게 새싹을 틔우고 있다. 화초도 기지개 켜며 꽃을 매달고 계절의 왕래를 알린다. 화분에서 피어난 하얀 등꽃이 눈길을 끈다. 흔히 보는 보라색이 아니어서 그런가 보다.

다양성으로 조화를 이룰 때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건 아닐까 싶다. 이를 위해 자연의 생명체는 종족 번식에 여념이 없다. 지난여름 맺은 접시꽃 씨앗이 3m쯤 떨어진 곳으로 날아가 발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그곳은 울담 밑 자갈이 깔린 최악의 터라니 놀라울 뿐이다.

화초를 옮겨 심으면 후탈이 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땐 먼저 난 가장자리 잎이 시들면서 중심의 어린잎을 보호한다. 인간의 내리사랑을 연상케 한다. 공중에 홍등을 단 듯 빨간 열매를 풍성히 맺고 겨우내 새들의 먹이가 되었던 먼나무도 무언의 이야길 한다. 상록수인데도 열매가 모두 사라진 얼마 전에야 잎갈이에 분주하다. 툭툭 잎을 떨구는 모습이 자녀 양육하느라 일찍 노쇠한 부모님 세대와 겹친다.

얼마 전 아들이 바람 쐬러 가자며 우리 내외를 태우고 신산공원으로 갔었다. 화창한 날씨여선지 꽤 많은 사람이 봄날을 즐기고 있었다. 부모 손 잡고 온 어린이들, 연인들, 노인들도 보였다. 만개한 벚꽃과 노란 유채꽃이 눈길을 끌었다. 다정하게 이야길 나누거나 적당한 배경을 골라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쌓는가 하면, 혼자 벤치에 앉아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벚꽃을 바라보노라면 아름다운 공동체를 떠올리게 된다. 화사한 미소로 함께 절정에 이르러 함께 깨끗하게 진다. 갈수록 개인화되는 인간 사회를 안쓰러워하는 듯하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줄어들고, 고통도 온전히 자신의 몫이 되는 각자도생의 길로 세상은 빠르게 흐르고 있다. 시류와 더불어 혼족이 도달할 종점은 어떤 모습일까.

잠시 마당에서 서성이며 시쳇말로 멍때리기 하노라니 터키의 이슬람 현자로 알려진 나스레딘의 이야기 하나가 다가왔다. 한 어린이가 호두 한 소쿠리를 가지고 현자를 찾아와서 친구들에게 나눠 주도록 청했다. 신의 방식으로 나눠줄까 아니면 인간의 방식으로 나눠줄까 하고 현자가 물었을 때, 어린이는 신의 방식을 택했다. 균등하게 배분할 거란 생각과는 달리 현자는 친구들에게 들쭉날쭉 나눠주고 한 친구에게는 하나도 주지 않았다.

실망한 어린이가 그 이유를 물었을 때 현자가 대답한다.

”공평하게 주는 것은 인간의 분배방식이지. 신은 균등한 분배를 하지 않아. 그것이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방식이야.“

이해를 못 한 어린이에게 덧붙인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대접을 받는다면 누가 온 힘을 다해 생명의 위험조차 감내하며 살겠는가? 신의 방식은 호두를 나눠 준 것이고 그 호두를 가지고 서로 재미있게 놀며 지내는 것은 너희들의 몫이다.“

삶은 조건이 아니라 자세라는 말일 게다. 현재의 자신을 꼭 껴안고 새로운 눈길로 바라본다면 세상은 좀 더 내 편일 것이다.

몇 년 전 호주의 생태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가 104세의 나이로 ”이제 생을 마감할 수 있어 행복하다“라며 안락사를 선택해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생사는 전적으로 신의 몫이라 믿으며, 내겐 어떤 죽음을 주실까 때론 궁금해진다.

파란 하늘, 따뜻한 봄볕을 감사히 누리려 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