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 몽돌해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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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숙 수필가

사월인데 바람끝이 맵다. 7번 국도를 달리다 집채만 한 파도가 해변을 덮는 장관에 차를 멈추었다. 1.5km나 되는 해안이 몽돌로 덮인, 울산 12경에 꼽는 주전몽돌해변이다. 파도는 우르릉 소리를 내며 연이어 밀려와 해안을 하얗게 덮었다가 봄볕에 눈이 녹듯 사그라든다.

걸을 때마다 주먹만 한 몽돌이 짜그락짜그락 소리를 낸다. 자잘한 몽돌이 깔린 곳은 자그락자그락 좀 더 부드러운 소리가 난다. 파도에 구르는 몽돌은 차르륵차르르륵 리듬을 반복한다. 종일 들어도 거스름이 없을 중독성이 있는 소리다. 신발을 벗는다. 몽돌이 발바닥을 간질이며 미끄러진다. 제법 찬 기운이 돌지만 느낌이 좋아서 더 견뎌보기로 한다.

하릴없이 거니는 내 눈에 생경한 풍경이 들어온다. 덮칠 듯 달려드는 파도에 맞서 기다란 장대를 휘두르고 있는 이들이다. 낚싯대보다 훨씬 긴 장대 끝엔 갈고리가 달렸다. 뒷모습으로 보아 꽤 나이가 든 노인들이다. 그들은 집어삼킬 듯 달려오는 파도를 향해 전사처럼 장대를 휘두른다. 기세 좋게 덤비던 파도가 장수의 창에 쓰러지듯 그들의 허벅지를 휘감으며 해변에 하얗게 눕는다. 무엇을 하는 걸까. 무얼 하기에 위험을 감수하고 저러고 있는 걸까. 그들은 갈고리에 매달린 무언가를 추스르곤 다시 장대를 휘두른다.

잠시 후 한 노파가 불룩해진 주머니를 안고 해변으로 나왔고, 그걸 풀어놓는 걸 보고서야 그들이 모자반과 미역을 건져 올린다는 걸 알았다.

“거센 나불(바람)이 불고 나면 해초들이 바닷가 자갈마당에 천지삑가리로 누워 있어. 그것들이 어른, 아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를 동새벽에 바다로 불러내거든. 이 거친 동해 바닷가에 살면서 그걸 어찌 피해 가나. 그저 몸에 밴 습관처럼 해내야 하는 일이지. 해변에 널브러진 걸 줍는 건 누구나 하는 일이고, 더 부지런한 사람들은 갈코리가 달린 장대로 파도에 너울대는 걸 건져 올리는 거야.”

나중에 그곳 출신 지인에게서 들은 말이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나 먹거리를 취하는 방법은 환경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해녀였던 어머니는 매해 봄 망사리가 터질 듯 미역을 땄고, 아버지는 그걸 우마차로 실어 마당에 부려놓았다. 노란 보릿짚 위에 키재기를 하듯 나란히 누운 미역은 봄볕에 오그라들며 찝찔한 갯내를 사방으로 토해냈다. 꼬들한 미역귀를 잘라 불잉걸에 구워 입이 그을리도록 먹던 아이는 이제 환갑이 넘고, 어머니는 해녀를 그만둔 지 오래다. 나는 어릴 적부터 유별나게 해초를 좋아했다. 이른 봄 돌미역은 비릿한 맛이 남을 정도로 헹구어 된장에 찍어 먹고, 모자반은 끓는 물에 살짝 익혀 간장과 깨소금, 쪽파, 참기름 등을 넣어 조물조물 무쳐 먹고, 여름 청각은 파릇하게 데쳐 초고추장을 찍어 먹는다. 찝찔한 소금기에 머릿발이 송송 서면서도 밥을 제쳐두고 해초로 배를 채우곤 했다.

“파도가 거칠어 힘들겠어요. 미역이랑 모자반 좀 살 수 있을까요?”

짠물이 뚝뚝 떨어지는 미역을 보자 참지 못하고 불쑥 나온 말이다.

“하모. 맨날천날 쌔빠지게 하던 기라 인자 여싸타. 영감할마이 마주 앉아 집에 깰바께 만다꼬? 얼라들 까자값이라도 맹글어야제.”

손주 생각에 신이 났는지 손저울이 후하다. 주전부리로 넣고 다니던 사탕을 몇 개 드렸더니 한 줌의 덤이 또 얹힌다.

주머니를 비우고 다시 바다로 향하는 노파의 뒷모습에서 팔순이 넘도록 물질을 하던 어머니를 본다. 괜스레 울컥하여 미역 한 조각을 뜯어 잘근거린다. 짭짤하고 떫은맛에 절로 몸서리가 나며 눈앞이 흐려진다. 낯선 곳에서 만난 익숙함, 그리고 그 맛. 인간은 자신의 나고 자란 곳에서 인이 밴 입맛은 죽을 때까지 어쩔 수 없나 보다.

배내골과 얼음골 거쳐 호박소까지 들렀더니 해가 훌쩍 기울었다. 산등성이로 지는 붉은 노을이, 차 안을 가득 메운 갯내가 발길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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