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 죽음의 의혹·제주 학살 밝히기 위해 평생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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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생, 중문 법화사 신도…무오년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해 옥고
 이덕련, 제주도 최초의 기독교 장로…두 아들은 독립운동에 헌신
 이도백, 서귀포 야학 항일 활동…오사카에서 조선 소년동맹 조직
 이도영, 6·25 예비검속·학살에 따른 자료 수집…비밀문서 찾기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백조일손의 땅’ 전경. 이도영은 아버지 이현필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국내 자료와 미국의 문서등 자료 수집에 생을 바쳤다. 1950년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양민들은 섯알 오름에서 암매장 됐고 6년 뒤인 1956년 유족들이 유해를 수습해 안장했다. 

▲이달생李達生:1891(고종28)~1959, 무오년 법정사 항일운동. 본관은 고부 벽동공파, 이호연(李浩淵)의 아들로 중문면 회수리 ‘도래-물’에서 태어났다. 항일운동으로 일경에 의해 저지당하고 동지들과 함께 66명이 체포당했다. 1919년 2월 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평생 중문 법화사의 신도로 활동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918년 10월 5일 주지 스님 김연일(金蓮日)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삼고 또 선도교 신도 박명수(朴明洙)를 도대장(都大將)으로 삼아 군직(軍職) 체제로 400여 명을 편성, 중문경찰관주재소를 점거해 박살내고 일본인 관리와 상인들을 포박한 다음 서귀포경찰관주재소를 점거하기 위해 서귀포로 향하던 중 서호리 ‘서-호근머들’ 지경에서 저지당했다.

이덕련은 제주도 최초의 기독교 장로이다. 대대로 외도리 ‘도그내’에 살다가 애월읍 곽지리  모실개 마을로 옮겼다. 모실개 마을은 1894년 곽지리 과오름에서 분리돼 금성리가 됐다. 사진은 마을 경계가 확정됐을 때 이덕련이 살았던 금성리와 어도오름.

▲이덕련李德連:1872(고종9)~1950(분단시대), 제주도 최초의 기독교 장로. 호 모의(慕義), 본관 전주, 선대는 외도리 ‘도그-내’에 살다가 애월읍 곽지리의 ‘모실-개’ 마을로 옮겨겼다.

1872년 이경화(李京化)와 어머니 송정순(宋貞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본도 최초의 기독교 신자로서 1908년 이기풍(李基豊) 목사에 의해 처음 세례를 받았다. 교회사 연구가 김형석(金亨錫) 박사는 그의 글에서 이 금성교회가 서문교회보다 앞섰다고 보아 본도 최초의 교회임을 밝혔다.

‘모실-개’ 마을이 1894년(고종31)에 곽지리 과오름에서 분향해 금성(錦城)리라 했다. 금성 상동 ‘조팟-동산’ 706번지에서 이덕연과 부인 박열선(朴烈善)과 사이에서 이도종(李道宗)·의종(義宗)·기종(琪宗)·관종(琯宗)·성종(聖宗) 등 5남 3녀를 낳았다. 1907년 3월 10일 이덕련, 조봉호(趙鳳鎬) 등 8인의 구도자에 의해 금성리 ‘모실-개’ 마을에 자생적 가정교회로 시작, 이어 조봉호댁으로 옮기고 그는 12년 동안 구장을 하면서 양석봉의 집에서 회집해 예배를 보았다.

1911년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이 신민회사건으로 본도 조천리에 유배 왔을 때에 교분을 가져 후일 아들 이도종을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로, 또 차남 이의종은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로 진학시킬 수 있었다.

오산(五山)학교는 남강이 세운 민족주의 교육장으로 알려진 명문학교였다. 1923년에 금성리 591번지에 교회를 세워 이덕련 명의로 조선총독부에 등록했다. 신앙의 동지 조봉호(1884~1920)는 상해 임정의 군자금(軍資金) 모금으로 투옥되어 대구형무소에 옥중 순국하고 장남 이도종(李道宗)은 1919년 대한독립희생회사건에 연루되어 일제로부터 곤욕을 치렀다. 또 차남 이의종(李義宗)은 1917년 평북 오산五山학교를 8회로 졸업하고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재학 중 기미년 3·1 운동에 가담, 이 일로 일경에 끌려간 후 행방불명이 되어 일설에는 일제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이 장로는 일제로부터 늘 감시를 받았으나 기독교에 대한 정열과 신앙심은 더욱 굳어졌다.

1938년 한경면 고산으로 옮겨 고산교회의 장로로 기독교 발전에 기여했다. 1948년 6월 19일 아들 이도종 목사가 무신론을 믿는 공산주의자에 의해 생매장되어 순교(殉敎)함에 그는 부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유서가 깊은 금성교회가 폐허됨을 목격한 재미교포(在美僑胞) 실업가 김동빈(金東彬)이 1994년 귀향 때에 520평(시가 1억 원)을 매입하고 건축공사비 4억 원을 들여 현대식 건축물을 지어 1996년 8월 예배당을 봉헌(奉獻)했다.

▲이도백李道伯:1910(일제강점기)~?, 서귀포 야학의 항일활동. 사회주의 운동가, 광복 후 서귀면 인민위원회 재정부장. 본관은 고부 병동공파, 이원옥(李元玉)의 아들, 대정중학교 초대 교장 이도일(李道一)의 아우이다.

대정면 가파도 ‘겔파-섬’에서 태어나 어릴 때 어물상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모슬포 ‘모실-개’에 정착했다. 1915년 제주보통학교 6학년을 거쳐 목포상업고등학교에 입학, 1929년 동교의 4학년 때 광주 학생운동의 여파가 미쳐 항일 학생으로 지목 받아 퇴학을 당하자 서울로 올라가 경성고학당(京城苦學堂)을 졸업했다.

이어 보성전문학교에 입학, 2학년 2학기 때 항일관계 출판물의 발간으로 중퇴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에서 조선 소년동맹을 조직,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부친이 사는 서귀포로 귀환해 부친이 운영하는 잡화상 일을 도왔다.

이도영.
이도영.

▲이도영李道英:1947~2013, 본관 고부, 제주 학살에 따른 자료수집가, 대정읍 하모리 ‘모실-개’에서 이현필(李賢弼)의 큰아들로 경북대학 사대 교육심리과를 졸업했다.

네 살 때에 아버지의 변사(變死)로 이를 밝히고자 국내자료에 이어 미국에 건너가 미국무부차관보 고홍주(高洪柱, 제주교포 2세)를 만나 해제된 비밀문서를 찾기도 했다. 미국에서 NARA(국립문서기록보전처)를 출입하며 예비검속(6·25직후)과 학살에 따른 자료 수집에 생을 바쳤다.

미국에서 얻은 보도 자료는 AP통신을 통해 세계적 굴지의 언론사에 게재하도록 했다. 자족(自足)생활을 위해 ‘에리랜드 스노힐’에사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모진 병으로 여한도 풀지 못하여 타국 땅에서 1남 2녀를 두고 숨을 거두었다.

이도영 아버지는 1950년 6·25로 예비검속이 되어 희생자 이필현(李賢弼)의 아버지 이성철(李成哲) 등의 의견을 따라 예비검속 피살자 132명의 조상祖上을 섬기는 자손들이 죽어 뼈가 엉키어 하나가 되었으니 ‘조상은 132이요 자손은 하나이다.’라는 뜻에 모든 유족이 동조, 이곳을 백조일손(百祖一孫)의 땅이라 명명했다. 이도영이 편역한 ‘죽음의 예비검속:양민학살진상보고서’에서는 “1950년 8월 12일과 8월 20일 사이에 서귀포경찰서에 수감되었던 양민 350명 중 약 200~250명이 경찰에서 군軍에 인계된 후 행방불명되었고 모슬포경찰서에서는 약 210~250명의 양민이 ‘섯알-오름’에서 총살되어 암매장되었다. 제주경찰서에 수감되었던 양민 중 상당수(약 400~500명 추산)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행방불명된 자들은 수장 또는 장소불명의 곳에서 비밀리에 처형(주로 제주비행장과 도두봉道頭峰 근처에 암매장)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처형은 계엄군(제주도 주둔 해병대와 육군CIC, 일명 방첩의 단독으로 실행했기 때문에 경찰 고위 간부도 법원 판사도 알 길이 없었다.-- <중략>--예비검속으로 처형된 자들의 총계는 약 1000여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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