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초와의 공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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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순 수필가

요즘 들어 올레 걷기와 오름 등반으로 자주 산야에 접할 기회는 많지만, 그 옛날의 흔하던 들꽃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구온난화와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 생태계가 많이 파괴되었음이다. 옛 시절을 추억하며 야생 들꽃과 수목을 벗하여 살고 싶지만, 찌든 잿빛 도시 생활이라 집안에서 화초를 키우는 게 쉽지는 않다. 잔디가 깔린 마당과 정원에서 갖가지 수목을 키우는 단독주택 이웃이 부럽다.

아파트여서 재배 가능한 화초는 음지 식물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베란다와 거실 창문 쪽 공간에서 화초를 키우며 옛 시절을 추억한다. 나무와 꽃들을 수집해서 가꾸는 취미로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40년이 다 되었다.

오래전에 살던 연립주택은 공간이 좁아 세간을 놓을 자리에 앵글을 설치하여 신주 모시듯 화분을 층층이 진열하여 가꾸었다. 그 집은 베란다에 수도가 설치되지 않아 물 주는 시기를 놓치기 일쑤였다. 물을 제때 주지 못해서 애지중지 키워온 단풍나무 분재가 말라 죽었다. 오래된 수령에 수세도 의연하여 누가 봐도 탐날 정도의 작품이었다. 양지와 음지 식물을 가리지 않고 키우다가 느릅나무·은행나무·단풍나무 등이 말라 죽는 일이 종종 생긴다. 죽은 나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아쉬움은 현재도 집행형이다.

그 후 좀 큰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화초를 가꾸는데 불편한 점은 많이 해소되었다. 나뭇가지 전정과 수형 바로잡기 등 오랜 세월 나무와 함께 지내다 보니 재배 기술이 조금은 숙련되었다. 이제야 분재와 화초들은 진정한 주인을 만난 셈이다. 이제 베란다와 거실 일부는 20여 개가 넘는 화분이 자리하면서 조그마한 화원이 되었다. 햇볕과 바깥공기 통풍을 위하여 베란다 창문을 항시 열어놓고 화초를 키우다 보니 거실 온도는 좀 썰렁하다.

화초들은 베란다에서 내성을 강화한 후 거실로 들여와 진열한다. 실내에서 푸르름이 살아 숨 쉬는 목 향이 좋다. 잘 가꿔진 정원에 비할 수는 없지만, 화분에 심어진 화초에서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느낄 수 있다. 같은 환경에서 사람과 식물이 식구처럼 공생하고 있다.

주로 음지에서도 잘 자라는 파키라, 녹보수, 고무나무, 은행나무 따위와 관음죽, 산세비에리아, 게발선인장, 에피프레넘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몇 종류의 화초들이 있는데 이름도 모른 채 키우고 있다. 수종이 고급스럽지도 않고 값도 비싸지 않은 것들이다. 음지에서 잘 자라고 생명력이 강하면 그만이다. 고무나무는 꺾꽂이로 늘려 이웃에 분양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애지중지 가꾸면서 정이 들어 나에겐 모두 소중한 존재들이다.

화초들의 탄소동화작용으로 방안의 쾌적함을 얻을 수 있다. 자연의 오묘한 신비로움과 계절의 감각도 느낄 수 있다. 앙상한 가지에 돋아난 앙증맞은 연둣빛 새싹은 새봄을 알리는 전령사 역할을 한다. 연둣빛 이파리에 진녹색을 덧칠하며 신록으로 가는 계절의 순환을 본다. 여름의 뜨거운 햇볕 아래 무성하던 진녹색 잎사귀도 스산한 가을이 되면 낙엽이 되어 한 시절을 마감한다. 사계에 따라 변하는 화초들을 보며 유수 같은 세월의 흐름을 느낀다.

이른 아침에 눈길을 주는 화초가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날마다 나를 반기는 화초에 시선이 머문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미세하지만 달라지는 자태를 볼 수 있다. 녹색을 보는 것만으로도 상쾌함을 느낀다. 화초 가꾸기는 나의 일상이며 내 삶의 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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