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울음소리 들리는 인걸들의 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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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수월봉 영산비와 종루
수월봉, 비바람과 태풍 심해
오래전부터 기우제 지내기도
남지훈 목사, 영산비 건립 지시
2000년 12월 모조 비 복원돼
목관아 종루·탐라포정사 편액
수월봉과 당산봉 사이의 2㎞가 넘는 해안절벽에 비바람과 태풍이 몰아칠 때면 지역에서는 마치 용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한다. 이런 자연현상은 오래전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또한 고산기상대가 이곳에 세워진 배경이기도 하다. 사진은 수월봉 영산제를 드리는 모습.

▲기우제를 지내던 고구산과 용연

탐라순력도 등 여러 고지도에는 수월봉을 고산(高山), 한자두(汗子頭), 고구산(高丘山) 등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러한 지명들이 수월봉으로 바뀐 것은 1910년께 이곳에 세운 수월공(水月公)의 위령비에서 연유했다 한다. 또한 차귀현·신두모리·당산리 등으로 시대에 따라 쓰이던 지명은 마을에 재앙이 자주 발생한다고 해 1892년 고산으로 개명하니 마을이 평온해졌다고 한다.

수월봉과 당산봉 사이의 2㎞가 넘는 해안절벽에 비바람과 태풍이 몰아칠 때면 지역에서는 마치 용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한다. 이런 자연현상은 오래전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또한 고산기상대가 이곳에 세워진 배경이기도 하다. 그래서인가 18세기 편찬된 제주삼현도 등 옛 지도에는 이 지역을 용연(龍淵)으로 표기하고 있다. 인근 마을인 용수리와 용당리 지명도 이와 관련 있어 보인다.

또한 이곳 풍경에 매료된 인물들이 이곳 주변에 정착하기도 했는데 기묘사화로 1520년 유배된 이세번과 을사사화(1545년) 여파로 입도한 제주목사 임형수의 아들 임구와 임진왜란(1592년)을 거치며 삶의 터전을 옮긴 지영걸 등이 그들이다. 그들이 살았던 고산리 칠전동 근처를 지역에서는 지금도 ‘임현(설)령터’라 부른다.

제주삼현도 수월봉 당산봉 부분. 용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제주 유일의 수월봉 영산비(靈山碑) 건립과정과 내용

1699년 제주에 부임한 남지훈 목사는 순력 중 수월봉 주변을 둘러보며 ‘과연 인걸들이 좋아할 영산’이라며 감탄하곤 수행한 이들에게 이곳에서의 경작 행위 등을 금하는 영산비를 세울 것을 지시하고 또한 세울 위치까지 선정했다 전한다.

그리고 60여 년이 흐른 후에 실제로 제주 유일의 영산비가 수월봉에 세워지기에 이른다. 1757년 세워진 원래의 영산비는 마모되어 여러 글자들이 식별되지 않으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앞면: 有灵(靈)高近山禁田 乾隆二十二年 丁丑 五月日 浦西(신령스런 산이 높게 솟아 있으므로 산 근처에서 농사짓는 것을 금한다. 1757년(건융 22년) 정축 5월 둔포서면) 뒷면: 去 戊寅年 南使主 定標處(지난 무인년인 1698년 남(지훈) 목사가 이곳에 표식을 정하였다.)

2000년 12월 31일 수월봉에 세워진 커다란 모조 영산비 복원기에는 다음의 글이 덧붙여져 있다.

‘…16세기 때 유배인들은 수월봉에서 용왕지신을 받들어 기우제 제단을 설치하였으며, 숙종 24년(1698)에 남지훈(南至薰) 목사가 靈山碑를 세우도록 정표처(定標處)를 정하였다. 이 뜻을 받들어 영조 33년(1757) 有靈高近山禁耕碑를 건립하여 대정현감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영산비가 매몰되는 등 자취가 사라질 뻔했으나 주민이 발견하여… 원래의 영산비는 능선중앙부(3755번지)에 있었으나 비의 훼손 우려가 있어 別所(고산1리 사무소)에 보존 중이며 대신 모조비를 여기에 건립한다.’

남지훈 목사는 1699년 제주목사로 부임하였으므로 위의 무인년(1698년)은 1699년(기묘년)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유물과 유적은 원래의 자리에 있어야 더욱 빛이 난다. 수백 년 동안 수월봉을 지키던 원비 또한 원래 있었던 이곳에 옮겨진다면 역사 문화를 제 위치에서 보고 느끼는 소중한 계기가 될 것이다.

제주목 관아 종루(鐘樓) 탐라포정사(진해루).

▲남지훈 목사를 통해 본 제주목 관아 종루 풍경

수월봉 영산비를 비롯한 제주의 역사서에 적지 않게 등장하는 남지훈 목사는 조정에 아뢰어 문과 식년 초시를 제주에 개설케 했으며 화북진성에 객사인 환풍정(喚風亭)을 건립하고, 중수한 종루(鐘樓)를 탐라포정사(진해루)라 편액하곤 묘련사(애월읍 광령리 소재)에 있었던 종을 이곳으로 이전 시설하여 새벽과 저녁에 성문 개폐의 신호로 사용하는 등의 치적을 쌓았던 목민관이다.

반면 1846년 제주에 부임한 무관 출신 이의식 목사는 목관아 2층 누각에 걸렸던 종을 녹여 군기로 만들어버렸다. 도민들은 이의식 목사를 탐욕스럽고 포악하며 혹독한 관리로 여겨 범을 보듯 무서워했다 한다. 그러나 탐라의 도읍지에 종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비등하여 다음 해인 1848년 장인식 목사가 전남 영암 미황사의 종을 구입해 탐라포정사에 설치했으나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다.

지금의 목관아 누각에는 바다를 지키는 망루라는 의미인 鎭海樓(진해루)와 조선 8도에 1명씩 파견된 종2품인 관찰사(감사)의 관아라는 뜻인 耽羅布政司(탐라포정사)의 의미를 담은 편액이 달려 있다. 제주목사는 다른 지방의 목사보다 품계가 높은 정3품 당상관으로 제주도(島)의 관찰사 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제주목관아에도 탐라포정사(耽羅布政司)란 편액이 걸릴 수 있었다. 종루의 복원을 염원하는 도민의 뜻이 모여져 다시 제주목 관아 종루에 종이 시설되기를 바라본다.

 


 

지역 주민들에 의해 건립 추정…조위진 제주목사 설립 가능성도

고산 영산비 앞면.

▲영산비는 누가 세웠을까?

1984년 어느 날 고동희(현 제주목 관아 해설사)님은 수월봉 남쪽 기슭에 의문의 비석이 오래전부터 방치되고 있다는 소식을 이용익(전 고산2리 노인회장)님으로부터 전해 듣는다. 여러 자료를 통해 산기슭에 묻혔던 비가 영산비임을 인지한 고동희 해설사는 영산비 발견 과정 등을 ‘고산향토지’에 기록한다. 이렇게 제주 유일의 영산비(灵(靈)山碑)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비문 등의 여러 정황으로 보아 발견된 영산비는 지역민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적 인물 후예들이 이 지역에 거주했기에 지역민이 비문을 짓고 비를 세울 역량이 있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만약 영산비를 관에서 세웠다면 설립자는 당시 조위진 제주목사로 추정해 본다. 그 이유는 영조임금이 조위진 제주목사에게 내린 다음의 하교 때문이다.

“산릉(山陵)에 부역한 일을 보더라도 제주백성들이 나라를 향하는 마음은 가히 지성스럽다 할 것이다. … 네(조위진 목사)가 (제주에) 내려간 뒤 만약 제주 백성으로 하여금 한 사람이라도 하루를 굶게 만든다면 이는 네가 나로 하여금 하루를 굶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듯 숙종의 아들 영조는 제주백성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다 한다. 1720년 숙종이 승하하자 제주에서는 박계곤 등 30명이 넘는 일행이 능역에 참여하였다. 다음은 능역에서 제주사람들이 부른 노래이다.

“아 임금이 승하하셨으니 /

뉘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까 / 엎드려 비오니 하늘의 도움이 / 제주 백성의 외로움이여 / …”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는 제주 능역군을 위로하고 하사품을 전달하였다고 역사는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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