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추하지 않고 사치스럽지도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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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서울 나들이 일정이 잡혔다. 일 년에 한 번 남편의 정기 검사로 대학병원의 진료가 예약돼 있다. 이참에 보고 싶은 사람도 만나고, 꽃구경도 다니자면 여러 날 머무르게 될 것 같아 준비할 게 많다.

며칠 전부터 장롱을 뒤적거리며 무엇을 입을지 갈 때마다 매번 고민스럽다. 이것저것 찾아도 마땅히 눈에 들어오는 게 없다. 그렇다고 옷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렁주렁 걸린 게 옷이다. 코로나로 외출이 별로 없었지만, 철 따라 새 옷을 사 입은 지 꽤 오래긴 하다.

오랜 시간 동안 잠자고 있던 것들이 서랍을 차지하고 있다. 버리기 아까워 넣어 두었던 게 더러 유행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잘 손질해서 입어보면 나무랄 데 없이 마음에 쏙 든다. 유행은 돌고 돌아 잊힐 만하면 다시 찾아온다. 십여 년 전에 입었던 것을 요즈음도 즐겨 입는 것도 있다. 무난한 색과 유행을 타지 않는 디자인이라 싫증을 느끼지 않는다. 마음에 들면 계속 입게 되는 것도 많다.

한껏 잘 차려입었다며 이만하면 빠지는 차림이 아니라 생각하며 떠난 길이다. 서울에 도착해 거리로 나서면 왜 그리 내 모습이 후줄근하고 초라해 보이는지. 쇼윈도에 비친 내가 딴사람 같다. 그 순간 구겨진 종잇장처럼 기분이 씁쓸하다. 종잡을 수 없는 날씨로 춥거나 더워, 기후에 맞추지 못해 곤혹스러운 일도 생긴다.

비싼 옷이 주인 행세하는 것처럼 안 어울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저가품이라도 고가품처럼 우아하게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옷은 그 사람의 성향이자 개성 표현이다.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품위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거나, 매무새로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게 옷이다. 멋진 차림으로 타인에게 부러움을 사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갖고 있다. 옷차림이 날개가 될 수 있는, 특히 여자에겐 소망이다.

애초에 옷은 몸을 보호하고 건강을 위해 입었다. 실용적이고 수수하게 입었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은 멋 내기로 변했다. 사치와 허영으로 자신의 욕구에 눈이 어두워 절제를 못 하면, 결국 그 올가미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겉치레보다 실속있는 실생활이 필요한 현실이다.

대통령 부인의 패션이 국민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사회가 시끄럽다. 해외 순방 시 호화로운 차림이 국격이라느니, 사치라느니 논란이 뜨겁다. 어떤 옷은 웬만한 가정의 생활비를 능가한다. 서민들에겐 감히 넘보지 못할 가격이다. 코로나로 국민이 고통을 겪고 있는 때다. 나라는 이리저리 퍼 주느라 곳간이 거덜 날 지경이다. 장신구며 명품을 포함해 수백 벌이 되는 화려한 치장에 국민이 뿔났다. 단아하고 검소한 차림으로 해외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국모가 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검이불루(檢而不陋)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이불치(華而不侈)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고려 시대 문인이자 역사가인 김부식의《삼국사기》〈백제본기〉에 나오는 문구다. 백제 온조왕 15년에 새로 지은 궁궐의 건축미를 평한 글이다. 아름다운 백제예술의 진수를 표현한 것으로, 글 속에 함축된 뜻이 이즈음 세태에 천근의 무게로 와 가슴에 닿는다.

누추하지도 사치스럽지도 않은 삶의 잣대, 평범하게 사는 서민에겐 필요 없는 말이다. 다만 이렇게 생활한다면 품격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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