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청년들의 절박한 저항…해녀 항일 운동 바람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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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일, 제주농업학교 제2차 항일 운동 펼쳐 대통령표창 수훈

이문석, 제주해무청 재임 후 제주도의원 남제주군 제2군서 활약

이병성, 중문 청년 항일 활동 전개…해녀 항일 운동으로 이어져

이병화, 교장·지역 선관위원장 역임…제자들의 두터운 신망 얻어

이사문, 어민 항일 운동 전개…日 어업 침해에 생존권 투쟁 펼쳐

이삼성, 美 유학떠나 한인회 활동…주 정부 보조금 최초로 이끌어
이병성은 중문동 청년들과 함께 항일 운동을 전개해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아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사진은 이병성이 태어난 서귀포시 중문동 마을 일주도로.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이병성은 중문동 청년들과 함께 항일 운동을 전개해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아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사진은 이병성이 태어난 서귀포시 중문동 마을 일주도로.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이두일李斗一:1914(일제강점기)~?, 제주농업학교 학생의 제2차 항일활동. 충남 천안에서 생활, 이홍림(李洪琳)의 아들로 산북 구좌읍 평대리<갓-머리>에서 태어나 1927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로 진학해 2학년에 재학 중 장터에서 항일 격문을 몰래 붙였다.

3월 15일 밤에는 조천경찰관주재소 순사(巡査)에게 잡혀 1931년 8월 3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 광복절에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일이 알려져 모교 제주농고에서는 명예 졸업장 제1호를 발급해 그의 명예를 복권시켰다.

교장 사택(舍宅)으로 몰려가 뜰에 있는 장작·곤봉·돌멩이 등으로 유리창·가옥 기물을 부수니 일경에 의해 구속당하는 것을 보고 이두일은 홍성옥洪成玉(귀덕), 오화국吳化國(하도)과 함께 회합을 갖고 피신했다.

이두일은 성장 후 부산에 오래 살다가 최근까지 충청남도 천안(天安)시의 아파트로 옮겨 살다가 타계했다.

▲이문석李文錫:1933~?, 안덕면 사계리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제주해무청 재임. 1960년 12월 12일 제3대 제주도의원 남제주군 제2구에 입후보, 1116표로 양인수․김한익․지동수․강보성 등을 누르고 당선됐다.

▲이병성李炳星:1900(광무4)~?, 제주 중문리 청년의 항일활동. 본관은 고부<벽동공파>, 중문면 중문리<중-물> 태생, 변호사 이의형(李義珩), 김성호(金聖浩), 윤명룡(尹明龍) 3명이 자진해 나와 열변으로 변호했으나 32명에게 최고 7년형으로부터 10월형까지 각각 유죄 언도가 내려졌다.

그는 1933년 2월 28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1932년 재건 야체이카사건에 함께 연루되었던 사람 가운데 직접 야체이카 조직과는 상관없지만 김한정(金漢貞)의 영향 아래 활동했다.

이들의 신상을 재판 판결문에 의거해 보면 안구현(安九玹, 31, 도순), 진택주(秦宅周, 23, 상모), 강문범(姜文範, 23, 상예), 강석만(康錫萬, 26, 중문), 이병성(李炳星, 32, 중문) 등 10여 명이었다.

그런데 1931년 12월부터 구좌면 동부의 하도, 종달, 연평(우도)리 해녀들과 성산면 서부의 시흥<심돌>, 오조리<오졸-개>의 해녀들이 세화리<-곶>로 모여 집단적으로 항일 운동을 일으켰다. 이 저항 운동은 다음 해로 이어지면서 더욱 격화되어 전라남도 경찰관이 증파되면서 겨우 진정됐다. 전도의 청년 남녀 100여 명을 억지로 옭아매어 잡아 가두었다.

▲이병화李炳華:1907(융희1)~1948(미군정기), 초등교장, 선거관리위원장, 4·3사건 당시 순직교원, 한경면 청수리<청수물> 태생. 1907년 11월 3일에 부친 이동교(李東喬)와 모친 변정숙(邊貞淑)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5년 제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933년 전라남도 손불교(孫佛校), 1936년 애월교(涯月校), 1940년 표선교(表善校), 1944년 금악공립국민학교(今岳公立國民學校)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46년 교장으로 임명됐다.

교직에 있을 때 학생들과 주위로부터 신망이 두터워 재직 중에 폭도들에게 희생됐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이 몹시 애석해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1948년 금악공립국민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면서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의 제헌 국회의원 선거인 5․10 선거 당시 그 지역 선거관리위원장도 맡고 있었다.

선거를 방해하려는 좌익 폭도들의 지목을 받아 선거 전날인 1948년 5월 9일 좌익 폭도들에게 피납되어 순직하게 된다.

미망인 김현옥(金賢玉)은 국가유공자 유족으로 되어 있고 유자녀인 장남 이두우(李斗雨)는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했으며 차남인 이종우(李種雨)는 당시 광주사범학교에 다니다 부친이 폭도들에게 희생됐다는 말을 듣고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게 되고 후에 장교가 되어 국가에 헌신하게 된다.

장손인 이경철(李京澈)은 서울 한성여자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이사문李仕文:1888(고종25)~?, 추자도 어민의 항일 활동. 신도身島의 추자면 영흥리<절-구미>에서 태어나 어업에 종사, 추자군도楸子群島 일대는 황금 어장이라 해서 일본인들이 탐내어 왔다.

이후 6년이 지난 1932년 5월에 일본인들이 유자망流刺網 어업으로 남획이 심했다.

이에 격분한 영흥리와 대서리<큰-작지>의 어부 대표 김봉수(35)와 박병석(34)은 마을 주민들과 함께 생존권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일경(日警)이 출동, 영흥리 주민을 마구 체포, 이사문을 비롯해 나머지 11명에게는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삼성李三成:1934(일제강점기)~1982, 재미(在美) 학자, 본관 전주, 제주시 이도동<제주-성안> ‘두목-골’에서 이학형(李學珩)의 3남으로 태어났다.

철학박사 및 문학박사, 재미 사업가 이우성(李又成)의 이삼성(李三成) 아우, 1950년 6년제의 제주농업중학교 4년을 졸업하고 학제 개편에 의해 1953년 오현고등학교를 졸업(1회)하고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 1955년도에 도미(渡美) 유학을 떠났다.

KANSAS 주립(州立)대학교 철학과에 편입학 졸업하고(B.A.DEGREE) OREGON 주립대학교 대학원 졸업, MASTER DEGREE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HAWII 철학 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다가 MARYLAND 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 후 LOS ANGELES 한인회(韓人會)에서 부름 받고 한인회를 위해 근무하며 주(州) 정부로부터 최초의 보조기금을 받는 데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시인(詩人)으로서 “NATURE”라는 시를 발표함으로 유명 시인전(詩人傳)에 등재됐다.

또한 철학인으로서도 FAMOUS AMERICAN의 한 사람으로 그 어려운 “THE WEST OF THE WEST”라는 미국 유명인 사전집事典集에도 이름을 남겼다.

그 후 철학교수로 재직 중 젊은 나이 48세에 심장마비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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