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게 죽은 원혼 위로하고자 한 평생 바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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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7)이성교, 제주향청 주사·제주목 주사 등 역임…지방 발전에 공헌
 이성철, 백조일손 영령신위 제단 설립해 희생자 해원의 길 모색
 이성태, 상해서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는 등 항일운동 앞장 서
이성철은 백조일손 영령신위 제단을 세워 6·25 전쟁이 발발하던 시기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민간인을 추모하고자 했다. 사진은 민간인들이 희생된 송악산 설앗오름에 설치된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 제주일보 자료사진
이성철은 백조일손 영령신위 제단을 세워 6·25 전쟁이 발발하던 시기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민간인을 추모하고자 했다. 사진은 민간인들이 희생된 송악산 설앗오름에 설치된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 제주일보 자료사진

▲이성교李成喬:1874(고종11)~1930(일제강점기), 한말 관리, 초대 대정면장. 본관은 고부<벽동공파>, 대정읍 보성리<대정-골>에서 이응학(李應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한말 제주향청의 주사와 1902년 제주목 주사로 임명되고 또 제주관찰부의 참사를, 이어 초대 대정면장을 역임했다.

향토사학자 박용후朴用厚는 평하기를 “본래 구변이 매우 능하고 지방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고 하였다.

1915년 겨울 이성규(李成奎)가 대정면장 때에 대정면사무소 건물이 방화로 모든 문서가 불타버렸다. 이 면사무소는 본시 대정현의 정당(政堂)이었다. 불탄 관청 터전에 이성교의 제택(第宅)이 마련되었으니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은 “성규기달욕망(成奎旣達欲望)”이라고 혹평하였다.

여기 나오는 이성규는 곧 이성교(李成喬)와 동일 인물인지 아닌지 모호하다. 왜냐하면 대정면장을 역임한 이성규는 기록될 만한 곳에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915년 봄에 본도의 군제(郡制)가 폐지되고 도제(島制)가 처음으로 실시되면서 일본 경찰관 출신 이마우라-도모<今村병>가 초대 도사(島司)로 부임, 우리의 도정이 일제에 의해 완벽하게 장악된 때임을 유의해 볼 만하다.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의 비.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의 비.

▲이성철李聖哲:1888(고종25)~1969, 농부. 민족 분단기의 의협인(義俠人). 고부<벽동공파>, 대정읍 하모리<모실개> 태생으로 같은 마을의 이치훈(李致勳)(1894~1964)을 움직여 함께 ‘백조일손 영령신위百祖(一孫英靈神位)’라는 제단을 마련, 억울하게 죽은 원혼(寃魂)을 위로하도록 한 의인(義人)이다.

유해들을 안장, 이성철의 제의에 따라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고 명명하고 묘비도 건립하였으니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각 지구 계엄사에서는 사상적으로 지목받은 820여 명을 예비 검속한 바 있었다.

본도에는 같은 해 8월 9일 제주도 유지무고(誣告)사건이 발생하여 도내 최고위층의 유지 12명이 검속되었으니 이는 제주계엄사의 정보과장 신인철(申仁徹) 대위의 조작극임이 백일하에 밝혀졌다.

한편 같은 해 8월 20일(음력7월7일:칠석날) 상모리<상-모살개> 절간(切干) 고구마 창고에 모슬포경찰서 관내의 사상 용의자 347명을 구금하였다.

모슬포 주둔 해병 제3대대 김윤근 소령의 지휘로 같은 해 8월 20일 새벽 2시에 구금자 중 61명을, 또 같은 날 새벽 5시경 구금자 중 132명이 송악산(松岳山) ‘설앗-오름’ 탄약고에서 학살되었다.

이후 유족들에 의해 시신 운구를 시도했으나 계엄군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고 탄약고 입구를 봉쇄해 민간인 출입은 통제받았다.

1956년 군부대의 확장 공사로 탄약고가 붕괴되어 일부 유해가 노출, 동년 4월 8일 유족 이성철의 주동으로 시체 발굴을 시도했으나 당국에 의해 무산되었다. 이성철은 같은 마을의 이치훈과 뜻을 모아 아들을 위해 신원설치(伸寃雪恥)하기로 하였다.

그럴 것이 이성철의 아들 이현필(李賢弼)은 1948년 7월 제주농업중학교 6학년을 졸업, 대정면사무조 재직 중에 변을 당하였으며 이치훈의 아들 이태실(李泰實)은 이현필과는 같은 마을, 같은 권당에다 제주농업중학교의 동기 동창생이다.

이태실은 대정초등학교 교사로 재임 중에 변을 당했으니 아들의 신원(伸寃)을 위해 이성철과 이치훈은 쉽게 뜻이 통하여 1956년 5월 18일 유해 132구를 발굴, 상모리 부지 483평을 매입, “조상은 132명이요 자손은 한 사람이다”라는 뜻이다.

유족들은 1960년 8월 민의원 의장과 참의원 의장에게 희생자 명예 회복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이듬해 5·16 군사정변에 의해 묘비는 철거당했으나 1966년 이후 매년 칠석(七夕) 날에 소수의 유족들에 의해 행제(行祭)를 하게 되었다.

1989년 소설가 오성찬(吳成贊)에 의해 월간 샘이 깊은 물(4월호)에 이 진상이 공개 발표되고 같은 해 박서동(朴瑞東)에 의해 희생자 명단이 최초로 공개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993년 7월 백조일손유족회가 창립, 같은 해 칠석날 도비 900만 원 지원과 도의회의장 장정언(張正彦)의 성금 등에 힘입고, 또 유족들의 힘을 합쳐 ‘백조일손영령 위령비’ 건립 및 제1회 합동위령제가 봉행되고 이때부터 해마다 위령제가 거행됐다. 한 농부의 끈질긴 노력으로 인륜에 호소하여 제1차로 해원(解寃)의 길이 트인 것이다.

이성태

▲이성태李星泰:1901(광무5)~?, 독립운동가. 언론인. 조천읍 조천리 이용구(李龍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7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 또 서울의 사립 휘문고보에서 3년 간 수학,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서 조직부를 담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2월 27일 경성지법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선고받아 1934년 11월 19일 만기로 출옥하였다.

1919년 4월 경성청년학관에 들어가 9월까지 다녔다.

1920년 10월 상해(上海)로 가서 독립신문의 기자가 되었다.

1921년 3월 귀국하여 중앙학교 사무원으로 일하였다. 1922년 3월 창간된 신생활지의 기자로서 ‘생활의 불안’, ‘크로프트킨 학설 연구’ 등의 글을 실었다.

당시 신생활지(新生活誌)의 기자들은 유명한 항일 인텔리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면모를 살펴보면 김명식(金明植), 유진희(兪鎭熙), 신일용(辛日鎔), 정백(鄭栢), 이성태 등 5명인데 그 중 김명식과 이성태는 제주도 조천리 출신이었다.

1923년 3월 동아일보에 물산장려운동을 반대하는 논문 ‘중산계급의 이기적 운동’을 발표했다.

동년 8월 민중사 결성에 참여했고 9월 조선노동대회 준비회 발기인이 되었다.

1924년 6월 정재달(鄭在達)사건에 연루되어 한때 검거되었다.

당 기관지 <조선지광朝鮮之光>의 책임자가 되었고 상해로 가서 당 대회 상황을 양명(梁明)(거제도)을 통하여 코민테른에 보고하였다.

코민테른의 ‘국제 정세에 관한 보고’를 받아 입국했다.

6월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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