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도정 도민만을 위한 리더십 보여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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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주, C&C 국토개발행정연구소 소장/ 논설위원

2차 대전 당시 영국 수상 처칠에게 가장 중요한 전략적 목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나치 독일을 꺾는 것이었다. 그에게 다른 어떤 것도 이보다 더 중요할 순 없었다. 다음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그는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용기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첫째, 1940년 6월 22일 나치 독일과 프랑스가 휴전협정을 맺자, 처칠은 프랑스 선단이 독일군의 손에 넘어갈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에게 선단을 독일군의 힘이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옮길 것을 요청했고, 프랑스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알제리 오랑에 있는 프랑스 선단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2주 후인 7월 3일 프랑스가 처칠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자, 처칠은 공격을 명령했다. 그 결과 프랑스 군함 대부분이 가라앉거나 파괴되었다. 프랑스 수병 천명 이상이 사망했다. 비록 몇 주 전만 하더라도 프랑스가 동맹국이었지만 적국 독일을 이기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과감하게 공격했던 것이다.

둘째, 1941년 6월 나치독일이 1939년 체결된 독소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깨고 소련을 침공하자 전략적으로 즉각 소련을 지지하는 선동적인 방송을 했다. 스탈린의 나쁜 이미지를 잘 알고 있었던 처칠은 “누구든 어느 나라든 나치에 대항하여 싸운다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입니다. 누구든 어느 나라든 히틀러와 함께 행진한다면 우리의 적입니다.”라는 말로 소련을 지지해야 하는 자신의 전략의 불가피성을 국민에게 설득했다.

셋째, 처칠은 영국 혼자서는 절대로 독일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고립주의를 고수하고 있었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관계에 각별한 공을 들였다. 그에게는 동맹국이 필요했으며, 무엇보다도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는 것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중대한 문제에 관해서는 외무성을 통하지 않고 직접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전쟁 중 처칠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문서는 950통, 미국 대통령의 답장은 800통이었다.

그럼에도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처칠은 미국 대통령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면서 신뢰를 착실히 쌓아갔다. 그 결과 1941년2월 8일 영국의 전쟁 수행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무기대여법’이 미국 하원에서 통과되었다. 급기야 미국은 1941년 12월 일본 공군에게 진주만을 기습당하고 나서야 2차 대전에 참전을 결정했다.

이처럼 의지와 용기의 리더십 소유자인 처칠은 2차 대전 중 국민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육체적인 고단함을 무릅쓰고 악랄한 독재자와도 협력할 줄 알았고, 전쟁 승리를 위해서라면 피곤함도, 개인적인 모욕도, 신변의 위협도 전혀 개의치 않았음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그의 의지에 따라 미국 참전이 이루어졌고, 2차 대전은 결국 연합군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다.

다가오는 6월 1일 새로운 제주도정이 뽑힌다. 국내외 여건이 전혀 녹록지 않다. 새 도정의 어깨를 짓누를 일들, 즉 도민이 먹고사는 문제, 제2공항 건설 문제, 코로나 이후 제주산업 구조의 내실화 문제, 감귤산업의 문제, 청년일자리 창출문제 등이 산적해 있다. 정국이 요동치고 있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그렇지만 도민만을 위한 용기의 리더십을 소유하고, 현재와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선견지명(先見之明)있는 도정의 출현(出現)을 학수고대해 본다. 물론 모든 것은 도민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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