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구슬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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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춘희 수필가

이중섭 거주지가 사람들로 북적인다. 코로나로 거리두기가 계속되던 시기, 한산하던 평상은 야외 마스크 쓰기가 해제되면서 사람들에게 쉴 새 없이 자리를 내어준다. 멀구슬나무 꽃이 뿜어내는 그윽한 향기도 코로나에 지친 이들을 불러들인다.

 

할아버지 댁 마당 어귀에는 아름드리 멀구슬나무가 있었다. 집안 대소사에 나무 아래 평상에서는 가족들의 담소가 그칠 줄 모르고 신이 난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소리는 바람을 타고 담장을 넘나들었다. 그 광경을 누구보다 흐뭇하게 바라보는 이는 할아버지였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된 지금 손자들을 바라보는 내 얼굴에도 그 시절 할아버지처럼 미소가 번진다.

할아버지는 보기 드물게 억세고 농사일도 장정 두 사람의 몫을 하였다. 추수한 곡식을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타작하는 마당은 늘 분주하고 이따금 들리는 할아버지의 고함은 도리깨질 소리와 함께 집안을 흔들었다. 할아버지는 잠시도 게으름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부지런함과 서로 돕는 법을 익혔다.

어른의 고집은 가끔 식구들을 힘들게 했는데 환갑이 넘은 큰아버지가 마당에 꿇어앉아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고, 술기운을 빌린 작은아버지의 항명에도 바위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독불장군이라고 불평했지만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권위가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연스레 나무 아래 평상으로 향했다. 밭일을 나간 며느리를 대신해서 손주들을 돌보는 날이면 특히 나를 반겼다. 할아버지는 인간의 도리나 삶의 이치를 일러주곤 했는데 대부분 경험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해 질 녘까지 이어지는 말씀은 지루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교실 밖 학교나 다름없었다.

 

소달구지가 다니던 좁은 길에 경운기가 다니게 되면서 멀구슬나무도 잘려나가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나무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굵은 대목은 어림도 없지만, 토막을 몇 개 얻어다 내 책상이나 하나 마련해 주었으면 했다.

중학교 3학년인 나에게 작고 낮은 앉은뱅이책상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늘 옹색하고 불편했다. 용기를 내어 할아버지께 부탁드렸으나 아무 말씀이 없어 서운함은 어린 가슴에 구멍을 냈다. 휑하니 남은 그루터기를 바라볼 때마다 맥이 빠졌다. 할아버지와 사촌들을 보는 것도 뜸해졌다.

책상에 대한 미련도 바쁜 생활과 체념 속에 점차 옅어질 무렵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새 책상이 내 방에 떡하니 놓여있어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책상에 얼굴을 대고 쓰다듬었다.

아버지는 책상 때문에 할아버지를 찾아간 것은 까맣게 모르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끝까지 함구하였다. 할아버지라고 어찌 다른 손자들에게 미안하지 않았을까.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실타래처럼 엉켜 복잡한 마음이었다.

요즘도 사촌들이 모이면 할아버지로부터 야단맞은 얘기를 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많은 식솔을 거느린 할아버지라고 어찌 외롭고 고독한 순간이 없었을까. 늘 강인한 모습만을 보인 어른의 속 깊음을 지금에야 헤아려 본다.

 

멀구슬나무를 올려다본다.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수많은 꽃을 피우고 그늘이 크다. “내 나이 구십을 훨씬 넘겼으니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이 자손들을 두고 어이 눈을 감을꼬.” 하셨던 할아버지. 자손은 아무리 많아도 귀하고 소중한 존재가 아니던가. 돌아가실 때까지 맑은 정신을 놓지 않으셨으니 자손들과의 이별은 평생 업으로 살아온 힘겨운 농사일보다 천 배, 만 배는 힘든 일이었으리라.

멀구슬나무를 안는다. 할아버지와의 해후는 따스함으로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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