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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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형 제주문인협회장

5월 16일이다. 1961년 5월 15일 저녁부터 18일 정오 무렵까지 서울, 부산, 대전, 광주 등 도시를 중심으로 임시적 군정 실시를 목적으로 군사혁명 성격의 정변이 일어났다.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십 수 명의 장성들과 수십 명의 장교들의 사전 모의를 통해 무능한 국정운영을 하고 있는 민주당 정권을 제거하고 군정을 수립하기 위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는 혁명이라고 했으며, 혁명이라는 말은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서 국가의 기초, 사회의 제도, 경제의 조직을 급격하게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로 권력이나 조직 구조의 갑작스런 변화를 의미한다.

5·16 쿠데타 세력은 4·19항쟁 이후의 정치권과 사회의 불안정함, 기득권과 이익집단 및 군의 반동적이며 보수적인 경향을 원인으로 보고, 제2공화국의 정치력 부재와 사회·경제적 혼란으로 응축되어 있던 불만이 촉발되었다고 주장하면서 5·16을 정당화했다.

5·16 쿠데타는 찬반의 이중 평가를 받고 있다. 중화학 공업, 고속도로, 새마을 운동 등으로 후진국이었던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끌어올리는 데 마중물이었다는 긍정적인 시각과 민주화에 역행했다는 시각으로 독재정권을 비난하고 그 흔적을 지우려고 노력하는 두 집단으로 나뉘어져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군사독재로 고초를 당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경제개발로 가난에 허덕이던 국민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주었다는 고마움을 가진 사람도 있어 5·16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쪽이 정당성이 더 큰 지는 정치적인 신념에 따라 그 해석을 달리한다.

나는 5·16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가족사를 떠올린다. 4·19혁명 후 해무청에서 근무하시던 아버지가 면장으로 발령이 났으며, 그 해 겨울 면장선거에 당선되셨는데, 5·16 쿠데타가 일어나서 호적정리를 게을리 했다가 실직을 하셨고, 청와대라고 불리던 집에서 셋방으로 밀려나 아주 작은 방 두 칸에서 일곱 식구가 5년 동안 살았다. 어머니의 바느질과 임대한 밭에서 농사를 지어 근근이 살았던 유년시절을 생각하면 5·16은 결코 반갑지 않다.

대학에 다닐 때, 다시 면장을 거쳐 통일주체대의원이 되셨던 아버지와 박정희 정권에 대하여 자주 논쟁을 벌였다. 군사독재정권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중앙정보부가 발족되어 정보정치, 공작정치를 펼쳐 헌법질서를 통한 민주주의가 자리 잡기 전에 붕괴시키고 정권이양의 약속을 뭉개버려 도저히 좋아할 수 없었다.

그러나 60대가 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분단, 6·25전쟁 등으로 후진국이었던 우리나라를 경제개발을 통해 선진국으로 올라설 수 있는 근대화 정책을 펼쳐 현재 우리가 누리는 풍요가 5·16이 시발점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그가 덜 미워졌다. 5·16쿠데타는 헤겔의 변증법처럼 정반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삶을 향상시켰다고 보는 나의 생각은 오판일까. 역대 대통령 여론조사 순위를 보면 나랑 같은 생각을 하는 국민이 많은 듯하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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