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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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진 수필가

대문 밖을 나서자마자 어제보다 한 켜 더 쌓인 재활용품 더미에 눈이 간다. 너저분한 모습에 고즈넉함이 깨지는 순간, 양미간을 찡그린다.

지난가을, 대문 앞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살짝 틀면 보이는 집에 할머니 한 분이 이사를 오셨다. 그 이튿날부터인가 싶다. 이른 아침과 늦은 밤에 두들기고 부수는 금속성 마찰음이 들린 게. 그분의 부지런함이 어른 키보다 조금 높고 긴 담벼락에 재활용품들을 층층이 쌓기 시작했다. 식용유 깡통, 철근 더미, 고물 자전거, 골판지 상자…. 이런 것들이 차 한 대 빠져나갈 수 있는 골목의 폭을 더 좁혔다. 지나는 차와 오가는 사람들의 사이가 아슬아슬해 할머니 물건들에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불편한 시선은 대문 안에도 있었다. 우리 집 마당 한구석엔 아파트에 사는 지인들이 부러워하는 손바닥만 한 텃밭이 있다. 아침마다 차 한 잔을 옆에 두고 창가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텃밭을 본다. 많은 사람들이 뇌를 잠시 쉬게 하기 위해 불멍, 물멍, 숲멍 등을 즐긴다면 나에겐 텃밭멍이다. 싱그러운 초록을 눈에 담아 멍때리고 있으면 분위기 있는 카페 저리 가라다.

나에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곳이 누군가에게도 그러했나 보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텃밭멍을 하고 있었다. 어제까지 보지 못했던 모도록이 올린 흙의 모양새가 이상해 파헤쳤더니 고양이 똥이다. 연이은 불청객의 방문이 내 느긋함을 앗아 갈 줄이야. 텃밭멍 대신 눈을 부릅뜨고 다녀간 흔적 찾기에 바빴다. 어느 날은 볼일을 보고 울담 위를 오른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잠깐의 눈싸움에도 피하지도 않고 보란 듯 의기양양 사라지던 그 무례함이 얼마나 얄밉던지. 부아가 난 김에 텃밭을 다 덮을 정도의 그물을 사들였다.

하지만 밭에 그물을 치려 하니 남에게 들이대던 잣대가 나를 향한다. 만약에 어떤 이가 나와 같은 행동을 한다면 나는 그를 비난하지 않았을까. 길고양이에게 먹이 주는 이도 있는데 당신은 그런 아량조차 없냐고. 이웃 할머니에 대해서도 그렇다. 재활용품을 모아 팔아야 더운밥 입에 떠 넣는 삶인데 그것을 이해 못 하냐고. 막상 나와 관련되니 내로남불이다.

일상 사소한 일을 통해 각성의 시간을 갖는다. 어떤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어느 드라마에서 인상 깊게 들었던 대사가 생각난다. 주인공과 대립관계인 직장 동료가 말했다. “나는 네가 하는 모든 계획에 반대할 거야. 왜냐하면 그 일이 잘못되었을 때 일어날 상황이 있기 때문이야.” 반대에도 귀 기울어야 할 까닭이 있음이다.

‘트레바리’는 이유 없이 남의 말에 반대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의 사람을 일컫는 순우리말이다. 요즘 들여다보는 세상엔 트레바리들이 더욱 눈에 띈다. 그냥 반대를 위한 반대에 혈안이 되어있는 사람들. 아무런 명분 없는 반대의 아우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공연한 피로감이 올라온다. 무조건 반대가 아닌 타당한 구실이 있어야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이해하는 관계 속에서 해법이 나오니까.

어수선했던 골목이 변했다. 집주인 아들의 설득에 할머니 재활용품들이 반으로 줄었다. 예전처럼 쌓아두지 않고 바로 팔러 나선다. 이제 대문 안의 불편한 시선만 남았다. 나도 고양이와 타협하고 싶다. 돌아다니다 급할 때만 찾아오면 안 되냐고. 인간들은 자기 입장만 고집한다고 반문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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