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와 탐관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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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동철, 편집국 부국장

조선시대 제주사람들은 군역뿐 아니라 온갖 노역을 감당했다.

그중 가장 꺼렸던 일은 진상을 위해 미역을 따던 잠녀(潛女), 전복을 잡던 포작(鮑作), 말을 기르던 목자(牧子), 귤을 키웠던 과직(果直), 이들 진상품을 운반하는 뱃사람 선격(船格), 관청의 땅을 경작하던 답한(畓漢)이었다. 이들의 노역은 ‘6고역’이라 부를 정도로 민초들의 삶은 고단했다.

제주특별자치도지사에 해당되는 조선시대의 직책은 제주목사다.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 동안 부임한 제주목사는 286명이다.

사료에 따르면 조선시대 500여 년 동안 제주목사 58명이 선정을 베풀었다. 정치를 잘못한 목사는 15명으로 꼽혔다. 문책 사유로 임기를 채우지 못한 목사도 허다했다. 6개월을 넘기지 못한 목사는 28명, 1년을 채우지 못한 목사도 65명이 됐다.

파직되거나 탄핵을 받아 압송된 목사는 68명에 이르렀다. 더구나 14명은 탐관오리여서 백성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반면, 기건, 이약동, 이수동 목사 등은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다.

기건 목사는 겨울에도 알몸으로 물질하는 해녀를 안쓰럽게 여겨 평생 전복과 미역을 입에 대지 않았다.

이약동 목사는 이임 시 관물과 관복을 두고 떠나는 도중 말채찍을 손에 쥐고 있자, 이마저도 관덕정 기둥에 걸어 놓고 퇴임했다. 그는 말년에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청렴하게 살았다.

이수동 목사는 민가에서 귤을 징발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별방·수산·서귀·명월 등 방호소가 있는 곳에 과원을 조성해 군인들이 관리하고, 진상하도록 했다.

허명 목사는 백성들이 빚으로 허덕이자 법적 보장이 없는 차용문서를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줬다. 나아가 이 문서를 태우고 무효라고 선언, 민초들을 구원했다. 효력이 없는 문서를 ‘허명(허맹)의 문서’라 불리는 이유다.

가렴주구와 폭정을 일삼은 목사도 있었다. 1619년 부임한 양호는 탐학이 극도로 심해 여러 차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으나 광해군의 비호로 무마됐다.

백성들은 그를 호랑이 대하듯 두려워했다. 벼슬에 쫓겨나도 제주에 남아 행패를 부리던 양호는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체포돼 사형 당했다.

학정으로 원성을 불러왔던 탐관오리가 있는 반면, 애민정신으로 선정을 베푼 제주목사를 위해 도민들은 선정비(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를 세워 그 공을 기렸다.

조선시대 목사 중 청백리는 아니더라도 흉년에 백성을 구휼해 민심을 수습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여러 목사들은 외적을 물리치고 부지런히 정사를 돌봤고, 세금을 감면해줬고, 각종 장부를 샅샅이 조사해 민폐를 없앴다.

6·1지방선거가 12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유권자의 시간이다.

관직 수행 능력은 물론 청렴·근검·도덕·인의까지 갖춘 청백리와 같은 이상적인 후보가 없거나 지지하는 후보가 없더라도 소중한 한 표는 행사해야 한다.

조선시대 제주목사는 왕이 임명해 백성들의 선택권은 없었다. 지금은 앞으로 4년간 제주를 이끌고 선정을 베풀 제주도지사를 유권자들이 선택하게 됐다.

이약동 목사(재직 1470~1473)는 겨울철 백록담 정상에서 한라산신제를 올리던 중 동상으로 죽거나 다치는 백성이 나오자, 신단을 아라동 산천단으로 옮겨 제를 봉행하도록 했다.

오로지 도민을 위해 일하고, 도민들의 마음을 헤아려 정책을 펼칠 목민관을 뽑는 선거가 눈앞에 다가왔다.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들은 제주목사가 바로 청백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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