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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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화

새벽잠에 친정어머니를 뵈었다. 근래 들어 어머니 생각이 간절했는데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이었다. 내 마음을 어찌 아셨을까.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나의 손을 꼬옥 잡아주고는 아무 말씀도 없이 스친 듯 사라졌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어머니’ 부르다가 그냥 깨어났다. 머리가 멍하다.

“할머니 많이 아프세요?”

옆에서 자던 손녀가 나의 허리를 감싸며 걱정스러운 듯 묻는다. 손녀의 따뜻한 손길에, 어머니 다리에 매달려 투정 부리던 아득한 유년 시절이 떠올랐다. 엄마가 커트해준 둥글납작한 단발머리가 맘에 안 든다고 얼마나 투정을 부렸던가. 그때마다 엄마의 두 다리를 붙잡고 학교 가지 않겠다며 울었던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온다.

몸에 생긴 변화로 인해 우울한 날들이 이어졌다. 누가 이런 고통을 알까. 힘들어하던 어머니의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몸이 가려웠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가려움은 아픈 것보다 더 참기 힘들었다. 몇 년째 병원에 가서 주사 맞고 약 처방을 받고 있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다. 처음에는 알레르기 증상이라고 생각해서 체질이려니 했는데 어느 날부터는 온몸에 작은 동전만 한 두드러기가 꽃을 피웠다. 견디다 못해 응급실행도 여러 번,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장육부가 다 고장인 듯하였다. 두통이 오기 시작하면 송곳으로 후비는 듯한 통증은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 아침, 저녁 약을 규칙적으로 입에 털어 넣었다.

며칠 전에도 통증 때문에 병원에 갔었다. 두둑한 약봉지를 들고 약국을 나서는데,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약에 의지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이 조그만 알약에 삶을 의존하는 모습이 서러웠다.

종합검진을 받아도 시원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 여기저기 수소문하던 중 육지 지역에 대체 의학으로 치료하는 병원을 알게 되었다. 생전 가 보지 않은 곳이라 걱정도 되고 궁금했다. 원인이 무엇인지 검사를 받아보고 싶었다. 아이들은 차라리 대학병원 가서 진료할 것을 권유했지만 내가 원하지 않으니 물러섰다.

초행길이라 육지 병원 갈 때마다, 아이들은 노심초사다. 처음엔 삼 남매가 한 차례씩 병원을 안내하며 동행하다가, 모두가 자기 일이 있으니 이제는 혼자 간다. 병원비를 결제하라고 공동 카드까지 만들어 주었다. 딸은 매번 비행기 탑승권을 폰으로 보내오고 중간 전화를 하며 걱정이다.

“조심해서 갔다 옵서예.”

자기들 일상도 바쁜데 엄마를 걱정해주는 아이들이 고맙고 미안해서 힘들다는 내색도 못 하고,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젖는다.

중산간 마을에서 하루에 두세 차례밖에 버스가 없던 시절이었다. 마을 어귀 팽나무 정거장에 동그마니 앉아 버스를 기다리며, 병원에 오가던 어머니의 그늘진 모습이 아른거린다. 자식들이 곁을 떠나고 홀로 살면서도 짐이 될까 내색하지도 않던 어머니. 오지 않은 자식들을 기다리면서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오빠와 남동생은 서울에 살고, 제주에 사는 건 나 혼자뿐인데 일상에 쫓기다 보면 어머니를 보살펴 드릴 여유가 없었다. ‘오늘은 시간을 내야지’ 하다가도 마음으로 끝날 때가 많았다.

오빠는 서울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화했다. 통화가 안 되면 나에게 비상벨이 울린다. 그때마다 허겁지겁 마음 조이면서 이 십리 길을 비상등을 켜고 달려야 했다.

“이제랑 혼자 지내지 마랑 서울 갑써. 무사 혼자 지내멍 맨날 자식들 걱정허게 햄 쑤과?”

아무것도 모른 채 툇마루에 앉아 어린애 같은 얼굴을 한 어머니를 보면 무탈함에 가슴을 쓸어내리다가도 바늘처럼 날카로운 말을 쏟아내고 말았다. 그럴 때마다 ‘미안허다’라며 머쓱해하는 어머니를 두고 돌아서면 내가 쏟아놓고 미끄러져 살갗이 벗겨진 것처럼 가슴은 얼얼하곤 했다.

이제 어머니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한 줌이 넘는 약 방울을 헤아리며 입에 넣을 때마다, 어머니 방에 놓여있던 약 봉투가 겹쳐진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 텃밭을 내다보았다. 이른 아침이라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손질하지 않은 텃밭은 작은 풀숲이다. 밭 한가운데 어머니가 서 계시는 듯하다.

<김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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