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私學)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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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권일, 수필가·삼성학원 이사장

사립학교는, 궁핍한 시대의 어두운 항로를 비추었던 등대의 불빛이었다. 당장 먹고사는 일마저도 감당하기 힘들었던 적빈(赤貧)의 후진국. 국민교육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의 국가 어젠다였다. 오죽했으면 의무교육도, 초등학교의 울타리를 맴돌며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을까.

그 때문에 중·고등학교의 높은 문턱을 넘지 못하는 청소년들의 절망이 방방곡곡에 산처럼 쌓였고,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불린 대학은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겐 금단(禁斷)의 소도(蘇塗)같은 배움터였다. 국가백년대계라는 교육의 총체적 부재 속에 나라와 지역 사회의 미래는 요원하여 아득했다.

혼돈(混沌)과 미망(迷妄)의 시대. 대물림되던 교육단절의 질곡을 끊고, 향학의 불꽃을 피워올린 영웅들이 있었다. 사립학교 설립자들! 육영보국(育英報國)이란 숭고한 단성(丹誠)으로 사재(私財)를 쾌척한 방명(芳名)의 독지가들이다. 삼성여자고등학교의 탄생에도 설립자들의 감동적인 미담(美談)이 회자되고 있다.

1975년 당시 서귀포에는 일반계 여고밖에 없었다. 당장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 실업계 학교의 부재. 가난한 여중생들은 졸업식장에 책가방을 내려놓고,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안타까운 교육 현실 앞에서 실업계 여자고등학교의 신설이 간절한 지역 현안(縣案)으로 부상했다. 지역 국회의원·교육감·학부모들이 앞장서서 삼성여고 설립자들의 부모님께 매달렸다. 평생을 흙먼지 속 농부로 살면서 적지 않은 부()를 일구어 낸 노부부에게 가난한 나라를 대신해 실업계 여고를 세워달라고 간구했다.

네 자녀들이 부모님의 뜻을 받들었다. 진학을 넘지 못해 무너지는 안타까운 여중생들을 위해 각자에게 돌아갈 유산들을 기꺼이 쾌척했다. 그 정재(淨財)로 학교법인을 설립하고 교사(校舍) 기공의 첫 삽을 떴다. 마침내 서귀여자실업고등학교가 고고지성을 울리며 태어났고, 향학의 눈빛 초롱초롱한 신입생 180명이 그 품에 안겼다. 차츰 지역살림 형편이 나아지면서 대학진학에 대한 열망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85년 삼성학원은 서귀여자상업고등학교를 일반계인 삼성여고로 전환하여, 지역의 요구와 시대의 변화에 부응했다.

삼성여고의 성장은 괄목상대할 만하다. 대학진학은 물론이고 교육 활동에서 수월성과 경쟁력을 과시하며 일신우일신의 기상으로 거듭나고 있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고 했다. 물을 마실 때, 그 귀한 물이 어디서 왔는가를 떠올려야 하는 것처럼, 미명(未明)의 시대를 밝히기 위해 정재를 바쳤던 거룩한 사학의 설립자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최근 일부 사학의 일탈(逸脫)을 침소봉대하여, 건강한 사학들까지 매도하는 언론과 여론의 질타에 사학 설립자와 구성원들의 허탈감과 자괴감이 깊어간다. 새롭게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사학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바로잡고 배전의 격려와 지원을 보내주실 것을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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