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언어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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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방영, 시인/ 논설위원

한라산에서 돌멩이 하나 굴리면 시인에게 떨어질 것이라고, 제주 예술가 중 시인의 수가 압도적이라는 말을 들었다. 시인이 해를 끼친다면 시집을 내느라 종이를 소모하는 정도일 것이며, 멀쩡한 보도 블럭을 걷어서 새로 덮거나, 오래된 나무를 베어버리면 그 타당성을 고심할 텐데, 그런 사람이 많다고 나쁜 일인가.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시라고 쓰면서 스스로 잘난 줄 안다고 반감이 생길 수는 있다. 그러나 읽을 준비가 안 된 독자는 어떠한가. 삶의 섬광을 언어로 붙들려는 사람이 시인이며, 압축된 글의 해독에는 집중이 필요하다. 더 급한 일로 뛰는 우리는 집중할 힘이 많지 않다.

그렇지만 노래를 전혀 부르지 않거나 억울함을 하소연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속담과 농담, 연애와 결혼, 아이의 탄생, 죽음과 작별, 눈물과 웃음이 다 시의 재료이다. 시를 쓰지 않아도 우리는 시를 살고 있는 셈이다.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1265~1321)의 시를 보자. ‘아직 그대 젊어서 아름답기에/ 그대를 보는 이의 마음이 사랑으로 흔들림을 알기에/ 돌 같은 자부심으로 그대 가슴 닫혀있구나.’ 연모하는 남성들에게 무심한 여성의 마음도 돌 같지만,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무반응과 마주친다.

입력된 말만 하는 로봇처럼 딱 필요한 말 이외의 응답은 하지 않으면서, 상황파악이 느린 사람을 무시하는 직원들도 가끔 만난다. 또 다른 사람 사정은 아랑곳 않는 이들도 있다. 주차장에서 동생이 타고 온 차를 주차하도록 공간을 비워주고 나와, 내 차에 타기를 기다리는데 동생이 잠깐 늦장을 부렸다. 그 사이에 차 한대가 들어와 멈췄다, 동생이 타고 나서 운전하여 나가니 기다리던 차 안에 여인이 창을 내리고 말했다. ‘나는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사람이야!’ 자신의 길에 하찮은 존재들이 걸리적거리다니 용서할 수 없다는 뜻 같았다.

러시아 시인 니콜라이 구밀레프(1886~1921)는 말의 기능에 주목했다. ‘말은 신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범위를 축소시켰다/ 이 세상의 하찮은 영역 안으로,/ 그래서 텅 빈 벌통의 죽은 꿀벌들처럼/ 죽은 말들이 악취를 뿜는다.’ 말에 포함되는 영적인 힘과 우리의 진솔한 마음이 다 닳아져 버린 현실을 안타까워한 것이다. 연못에서 시끄럽게 소리 내는 맹꽁이들처럼 무의미한 말들을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그 목적이 염불보다 잿밥을 탐내는 본심을 덮으려는 것인가 의심스럽다.

‘만일 내가 어떤 이의 가슴이 무너지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누군가의 아픔을 누그러지게 할 수 있다면,/ 혹은 한 가지 고통이라도 식힐 수 있다면,/ 기진맥진한 울새 한 마리라도 / 둥지로 가게 도울 수 있다면/ 내 삶이 헛된 것은 아니리.’ 미국의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의 시이다.

일이 있어 나가는데 아파트 마당에서 집을 찾지 못하는 할머니를 만나 말씀하는 주소에 차로 모셔다 드렸다. 내리실 때 천 원 지폐 두 장을 내밀기에 그냥 가시고, 4층에 잘 올라가시라고 당부 드렸다. 할머니는 기어이 천 원 한 장을 차안으로 던지고 내리셔서 쫓아가 돌려드렸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 좀 답답했다.

시란 결국 우리 삶을 말로 정리하는 것이므로 시인을 비난하기보다는 먼저 초조하고 급박한 자신을 살필 일 같다. 우리 모두 말에 유의하면서 말을 잘 다루어, 가끔 시도 쓰게 된다고 뭐 더 나빠질 일 있겠는가.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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