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에는 백로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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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심

뻐꾹, 뻐꾹. 뻐꾸기 소리가 들녘에 메아리친다. 노랑어리연꽃이 연못 가득 피어나고 길쭉길쭉 솟은 부들은 무성하다. 올챙이가 먹는 개구리밥이라고 하자 아이들은 신기한 듯 눈을 떼지 못한다. 물속에 사는 생물들도 꿈틀꿈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 분주하다. 언제 왔는지 훨훨 날아든 백로는 먼데서 온 손님 이라기보다는 연못의 식구인양 여유롭게 주위를 성큼성큼 걷는다. 싱싱한 나무들의 향이 짙어가듯 무르익어 가는 초여름, 백로와 조우하는 유월의 풍경이 눈앞에 가득하다.

우르릉 쾅, 비가 오려나? 훅, 얼굴에 닿는 바람 끝이 눅눅하다.

이런 날은 어림도 없지. 어느새 비를 머금은 매지구름이 가득 몰려온다.

오늘은 틀렸나 보다.

해마다 이때쯤엔 이곳을 찾는다. 하얀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걸어오는 아버지를 마중하듯이 한걸음에 달려오고 싶을 때면 집을 나선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 살았던 작은 마을, 이제는 예전의 서정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들로 점점 낯설어지지만 그래도 차를 몰고 우선 가는 곳이다.

결혼하면서 내 몫으로 넘어온 제사와 명절 의례는 벅찬 일이었다. 종가집의 며느리로 집안 대소사를 거뜬히 해내는 어머니 밑에서 배우며 자랐지만 막상 내가 맡아 하기는 힘이 부쳤다. 그에 딸린 집안일들, 양손에 매달려 자꾸만 보채는 아이들의 성화에 초여름 열기에도 시드는 풀잎처럼 나를 시들게 했다. 지친 하루의 유일한 위안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마을 초입에 있는 조그만 연못을 찾는 일이었다. 해가 떨어지면서 시원해지는 공기, 사방을 푸르스름하게 감도는 저녁 빛은 지친 나를 위로 해주기에 충분 했다. 잠깐이나마 시공을 초월한 먼 곳의 적막과 온전함에 숨을 깊이 들이쉬면 온 우주가 내 안에 들어오는 듯 편안해지곤 했다. 호사도 잠깐, 곁에 달린 조무래기들이 간간이 들려오는 맹꽁이의 울음이 무섭다고 어서 가자 손을 이끌며 재촉을 해댔다.

비가 내렸다. 유월을 타고 내리는 비, 장마를 알리는 장대비가 쏟아졌다. 고만고만한, 내 겨드랑에 닿을 만큼 자란 두 아이들을 데리고 빗물 흘러내리는 처마 밑에 서있었다. 찬비를 맞아도 숨이 막혔다.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 때문에 아픈지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두 손 들고 항복하고 싶었다. 나를 향해, 나의 삶을 향해. 무심히 내리는 빗물만, 빗물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날, 백로를 보았다.

백로는 으레 해마다 이즈음 날아온다. 혼자서 물가를 걷기도 하고 어딘가를 응시하며 오래 서있기도 한다. 그러다 전혀 서두름 없이 천천히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른다. 마치 새하얀 옥양목 천 한 폭이 바람을 타며 춤을 추는 듯하다. 오직 한곳에 마음을 두고 화두를 드는 선승이 저러할까. 백로는 백로여서 아름답다. 새들은 하늘을 날기 위해선 몸이 가벼워야 한다고 한다. 그게 힘이 덜 드는 비행의 조건이란다. 새의 골격의 수는 줄이고 뼛속은 비어있게 해서, 무게를 줄이고 골격의 조직은 더 치밀하고 단단하게 만들어 잘 날아가게 진화되어 왔다고 한다. 백로도 날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존의 방식을 터득하고 있었다.

하, 백로도 수행을 하고 있었구나.

후드득, 후드득.

비가 내리네. 잔뜩 몰려든 비구름이 한바탕 쏟아질 기세다. 만나지 못한 아쉬움 거두고 일어서야겠다. 비 그치고 나면 연못의 물도 가득 불어나리라. 한껏 싱싱해지고 푸르름 짙어가는 들판 위로 백로는 마음껏 날아올라 춤을 추겠지. 반들반들 윤이 나는 유월 하늘, 나의 비행은 언제쯤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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