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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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 서울과학종합대학원 특임교수/ 논설위원

나는 어머니와 산다. 60이 넘은 나이에 100세 어머니와 함께 살아간다. 아무리 고단해도 어머니 옆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면, 감사하다. ‘이 나이에 어머니와 한 방에서 잘 수 있다니...’라는 생각에, 가슴이 따뜻해 온다.

2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나를 따라 한국으로 오셨다. 아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이민한 지 17년 만이다. 미국의 장례식은 영화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마치 소풍을 가는 어린애들 마냥 아버지의 캐딜락을 따라서 공원묘지로 향했다. 6월의 푸른 잔디와 색색깔의 고운 꽃들, 얼굴을 간질이는 햇살과 바람이, 우리들의 슬픔을 가만가만 어루만졌다. 하기야 천상병 시인도 ‘귀천(Back to Heaven)’이란 시에서, 죽음이란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는 길’이라 하지 않았던가.

한국으로 돌아오신 어머니는, ‘제발 요양원에는 보내지 말아 달라’는 소리를 애원처럼 하셨다. 미국에서는 노인이 아파서 병원에 오래 입원한다 싶으면, 그 다음 행선지가 요양원이 된다. 해녀였던 어머니를 위해 바다가 마당인 보목마을로 이사를 하였다. 물때가 되면 바다로 나가서 보말을 잡고, 돌랭이 같은 벨레왓을 일궈서 밀감나무도 심었다. “아명허민 못사느냐, 싸는물(썰물) 이시민 드는물(밀물) 이신다’라면서, 어느새 어머니는 제주도 할망이 되었다.

90세에 접어들자 이따금 가스 불을 끄거나 수돗물 잠그기를 잊어버렸다. 보건소에서 치매검사를 해보니 어느새 중기, 장기요양인정판정 결과 3등급이 나왔다. 아침 9시가 되면 요양원차가 와서 어머니를 싣고 가는 재가급여의 주간보호 생활이 시작되었다. 신체활동 지원 및 심신기능의 유지·향상을 위한 교육·훈련이 주된 서비스다. 간식과 점심, 예방주사, 취미활동 등의 일과표가 유치원생처럼 집으로 배달되었다. 어머니는 휴일에도 대문 앞에서 봉고차를 기다린다.

요즘은 문득문득 요양원 입소를 떠올리게 된다. 기저귀는 물론 옷 입기, 세수, 식사, 걷기 등 생활 전반이 내 손을 요구한다. 끊임없이 어머니를 따라다니면서 닦고, 쓸고, 먹이고, 치워야 한다. 한 살 아기가 돼버린 어머니에게, ‘이러면 요양원에 보낸다’는 말을 뱉은 적도 있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라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울었다.

그래도 요양원에는 보내지 말아야지!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해져 요양병원으로 들어가는 할아버지가, TV 화면에다 쏟아놓은 독백이 떠오른다. “죽으러 가는 기분이야. 동네 사람들 중에 요양병원 갔다가 돌아온 사람, 아무도 없어.” 눈을 지그시 감는 할아버지의 그늘진 얼굴이 가슴시리도록 생생하다.

2020년 기준, 제주도내 65세 이상 노인 인구 10만1813명 중 치매환자 수는 1만1474명이다. 치매환자 유병율이 11.3%로, 전국 평균(10.3%)보다 적잖이 높다. 1인당 요양병원·요양원에서 지낸 기간 또한 제주도가 제일 길다.

그동안 미국은 노인요양제도를 대폭 개선했다. 자기 집을 떠나기 싫은 사람은 도우미나 간호사를 통해 가정에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가정간호(home health care)가 도입되었다. 아들이나 딸 등 가족이 돌볼 경우에는 최저임금 이상의 보수를 제공한다.

우리나라 노인들의 첫 번째 소망은 집에서 임종하는 것이다. 오몽해지는 한 혼자서라도 자기 집에 살기를 바라는 제주도 할망들의 오래된 소원이야 더 말해 무엇 하랴. 보리밥 한 숟갈 뜨는 둥 마는 둥 갈중이 걸치며 빌레왓으로 내달려 온 우리들 어머니만큼은, 집에서 임종하는 복을 누려야지 않을까.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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