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뿌리’ 탐라국 시조 위업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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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목사 이수동
이수동, 삼신의 후예로 봄·가을 두 차례 제사 지내도록 모흥단 세워
이승빈, 항일운동 펼쳐…1995년 광복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이승택, 제주도지사 발령돼 새마을사업·도시 균형개발 등 추진
이시형, 일제 말기 소설 ‘이어도’, ‘해녀’ 등 작필하며 문학 기여
이수동 목사가 삼성혈에서 춘추봉행제를 올리기 시작한 이래로 현재까지 1년에 두차례 삼성사대제가 이어져 오고 있다. 사진은 삼성혈에서 제례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이수동 목사가 삼성혈에서 춘추봉행제를 올리기 시작한 이래로 현재까지 1년에 두차례 삼성사대제가 이어져 오고 있다. 사진은 삼성혈에서 제례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이수동李壽童:생몰년 미상, 문신. 중종 때의 제주목사. 자는 대수(大叟), 본관은 전의, 이맹사(李孟思)의 아들이다. 1506년(중종1) 문과 별시에서 정과丁科로 급제, 1526년(중종21) 4월, 김흠조(金欽祖) 목사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528년 12월에 형조참의로 제수되었다. 1526년(중종21) 이수동(李壽童)목사가 춘추봉행제(春秋奉行祭)를 올리기 시작한 이래로 현재까지 1년에 두 번 개최하는 삼성사대제(三姓祠大祭)로 이어져 오고 있다. 삼성사대제(三姓祠大祭)는 탐라 시조(始祖)의 위업을 기리는 유교적 제례의식이다.

벼슬은 참판에 이르렀다. 목사 이수동은 1526년 조정에서 진상하기 위하여 감귤 재배를 장려, 도내의 5개 방호소(防護所)(별방·수산·서귀·동해·명월)에 과수원을 설치하여 소속 군졸로 하여금 수호케 하였다.

또 국둔전(國屯田)을 계파(啓罷)하고 변란을 당하거나 화재 발생 시 구급 용수를 마련하기 위하여 주성 안에는 우물이 없다고 하여 우련당지(友蓮堂池)를 홍화각(弘化閣) 남쪽에 파서 물을 저장하고 연꽃을 길러 그 위에 우련당(友蓮堂)을 건립하였다.

또 모흥혈(毛興穴)에 돌담을 쌓아 모흥단(毛興壇)을 구축해 보호하고 소비(少碑)와 홍문(紅門)을 건립하여 삼신의 후예로 하여금 춘·추의 제사를 두 번 지내도록 하였다. 삼성혈 안에 ‘혈단비(穴壇碑)’가 있다. 1526년(중종21) 목사 이수동(李壽童)이 처음으로 제단을 마련하여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혈에 설치된 목사 이수동 기념비.
삼성혈에 설치된 목사 이수동 기념비.

그 때의 비는 없어지고 지금 남아있는 비는 앞면에 ‘삼성혈(三姓穴)’ 뒷면에는 ‘숭정후사병진개수(崇禎後四丙辰改竪)’라고 음각되어 있어 1856년(철종7) 여름에 다시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또 삼성혈에 ‘사상이수동기념비(使相李壽童紀念碑)’가 1911년 6월 다시 세워졌다.

▲이승빈李昇斌:1891(고종28)~1927(일제강점기), 무오년 법정사의 항일운동. 본관은 고부<벽동공파>, 이재걸(李在傑)의 차남으로 중문면 하원리<오름-골>에서 태어났다. 일제는 항일운동 관련자 66명을 3차에 걸쳐서 목포검사국으로 송치하였다. 1919년 2월 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31명에 대하여서는 실형이 언도되고 2명은 재판 직전에 심한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1995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승택.
이승택.

▲이승택李昇澤:1922(일제강점기)~?, 교수, 정치가, 노동청장, 제17대 제주도지사. 본관은 전주, 제주시 2도동<제주-성안>에서 이윤희(李允熙) 아들로 태어나 목포상업학교를 거쳐 1944년 경성법학전문(京城法學專門)학교를 졸업, 1956년 제주대학 조교수로 재임 중 1960년 11월 제주시교육구 제2대 교육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1965년 12월에 제3대 노동청장에 피명, 1971년 6월 11일 제주도지사로 발령되었다. 이승택 지사는 1976년 1월 11일에 4년 7개월이란 최장기간을 재임하여 의원면직되었다.

한라산 무장대의 귀순을 권유하기 위해 1949년 1월 성무공작대가 구성되었다. 대장은 이기영(李基榮) 제2연대 소속, 대원은 신두방, 홍완표, 이승택, 김용수, 고영일, 김종철, 이기형 등 언론인과 인테리들이 참가하여 성과를 올렸다.

이 해 5·16정변으로 1963년 민주공화당 제주도지부 사무국장이 되어 제주도당 창당에 그 능력이 인정되어 동년 12월 중앙당 조직부장으로 발탁되었다.

이어 1965년 12월에 제3대 노동청장에 피명, 1971년 6월 11일 제주도지사로 발령되었는데 이는 대선(大選)에서의 공로도 컸지만 당시 공화당 사무총장 장경순(張坰淳)의 추천이 주효했다고 전해진다.

1972년 10월부터 제2단계 새마을사업을 위해 처음으로 여성들을 새마을지도자로 임명해 새바람을 일으켰다.

또 우회도로 확장 2단계 사업으로서 국도변(國道邊) 환경조성 사업을 시행, 나무 30만 그루를 심겠다고 장담했다. 이 무렵 국정감사반이 “일주도로를 확장하면서 보상하지 않아 주민의 원성이 많은데 지사의 견해를 밝히라.”고 하니 이지사는 “도민이 희사로 이루어진다.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제주도에서는 1974년 11월 20일 제주시 연동(蓮洞)지구에 신제주의 ‘뉴타운’조성 실무팀을 구성, 홍성림(洪性林) 건설국장을 반장으로 임명했다. 1974년 8월 8일 이지사는 간부회의에서 “불원간 ‘뉴타운’을 건설한 후보지는 제주시 외곽지대가 될 것이며 도시 균형발전을 위해 추진될 것이다.” 라고 언급했다.

이승택 지사는 1976년 1월 11일에 4년 7개월이란 최장기간을 재임하여 의원 면직되고 제18대 도지사로 장일훈(張日勳이 임명되었다.

장지사는 과거 제주도경찰국장으로 재임한 바 있다. 재야在野로 돌아온 이승택은 몸소 목축업에 손을 대었으나 재미를 보지 못했다. 1992년 10월 17일에 지역 원로들의 모임인 곰솔회 대표로서 회원 14명과 제주지방변호사(회장 강윤호康允豪) 회원 16명이 연서로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여 후일 제주고법부(濟州高法府)를 설치, 도민들에게 편리를 제공하였다.

▲이시형李蓍珩:1918(일제강점기)~1950(분단시대), 교육자. 소설가. 본관은 전주, 제농(濟農) 졸업, 이듬해 삼기(三岐)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발령받았다. 1937년 9월 경성(京城)사범학교 강습과에 들어가 이듬해 3월 졸업, 1944년 ≪국민문학≫ 8월호에 ‘미야하라-산지’<宮原三治>라는 이름으로 ‘이여도’를, 1945년 ≪국민문학≫ 2월호에 ‘신임교사’를 추천, 문단(文壇)에 데뷔했다.

일제 말 제주농업중학교 교사로, 1947년 제주도 3·1 사건 대책위원회(위원장 김용관) 부위원장, 동년 3월 7일 3·1시위의 대책과 투쟁방침 초안 작성을 의뢰받았다.

제주중 교장 이관석(李琯石)의 아우, 전라남도 함평공립소학교 교사로 재출발하고 1940년 3월 제주의 함덕공립소학교로 옮겨졌다. 더욱 배우려고 1940년 9월 서울의 혜화(惠化)전문학교 흥아과(興亞科)에 들어가 1942년 9월에 졸업하였다. 1943년 1월 함경북도 경성(鏡城)공립농업학교 교유로 발령받고 동년 11월 16일 제주공립농업학교로 이동 전입되었다.

그의 뛰어난 문장력은 후일의 화근(禍根)이 되었다. 1950년 6·25 직후 예비 검속으로 그 행방이 묘연해졌다.

일제 말기에 소설 ‘이어도’, ‘해녀’ 등을 썼다. 문학의 질을 시도해온 그는 4·3 사건 무렵 이데올로기의 희생이 된 것은 이 고장의 손실이며 문학 초기의 불행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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