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게 들끓은 제주…항일 선봉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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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제주 의병과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의병 김만석, 대정서 모병활동
고승천·이중심·김석윤 의병장
의병항쟁 계획 중 발각돼 무산
日 곡해한 무오법정사 항일항쟁
 ‘보천교 사건’  왜곡 진실 밝혀져
제주 서귀포시 중문동 법정악 일대에 위치한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은 1919년 기미독립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났다.
제주 서귀포시 중문동 법정악 일대에 위치한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은 1919년 기미독립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났다.

▲나라 위해 목숨 던진 의병 김만석

6월은 보훈의 달이고 6월 1일은 의병의 날이다. 그리고 오늘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백성들 스스로 조직한 의병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한 민초 김만석을 만나는 날이다.

제주 의병 거사일인 1909년 3월 3일을 앞둔 3월 2일 의병 김만석은 의병장 고승천과 함께 일제에 의해 대정읍과 안덕면 경계지점에서 처형되었다. 동광양 태생인 김만석은 고승천과 함께 대정지역의 모병활동 중 25세 나이로 목숨을 잃었다.

의병 김만석의 묘.
의병 김만석의 묘.

장례 지낼 가족이 없었던 김만석 의병의 시신은 처형장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정 안성리 주민들이 김만석 의병의 시신을 그 장소에 매장하였다. 잡초에 쌓여있던 김만석의 유해는 1976년 당시 남제주군에서 처형 근방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으로 옮겨 재단장하고 비를 세웠다. 그 후 김만석의 유해는 1977년 사라봉 모충사로 이장되었으며, 현재 그 자리에는 ‘의병 김만석의 묘’라는 비석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김만석에 1995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제주 의병항쟁의 진행 과정과 의병장 김석윤

제주에서는 1909년 의병장으로 고승천·이중심·김석윤 세 분이 추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병장 김석윤에 의해 작성된 격문과 통고문을 접한 제주 도처의 이장들은 각각 주민들을 모아 의병활동에 동참해 나갔다. (조천읍) 대흘리 이장 부우기와 (한경면) 두모리 이장 김재형은 동네 장정들을 모아 의병이 참여하던 중, 명단이 왜경에 압수된 김재형은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로 유배형 3년을 언도받기도 했다.

명월리 이장 조병규는 격문과 통고문을 왜경에게 탈취당하자, 구우면(한림읍)장 진정국의 도움으로 통고문을 다시 쓰곤 대림·수원·귀덕리로 발송하기도 했다.

격문 등을 작성한 (제주시) 오라리 태생인 김석윤은 젊어서 전남 대흥사 등지에서 불가에 천착하였으며 1908년 호남의 의병장 기우만 등과 연락을 취하며 동지들을 규합하기도 했다. 김석윤은 고사훈 등과 창의(倡義)하여 광양에서 노상옥 등과 함께 무기를 제조하고 황사평에서 비밀리에 의병을 훈련하고, 이에 따른 자금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고사훈·조병생·김만석·김재돌·양남석 등은 대정에서 기병하여 제주성 관덕정에 집결하기로 하는 한편, 김석윤은 이중심·양만평·노상옥·한영근 등과 함께 제주 성안에서 호응, 결전을 벌여 일본인들을 축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모병 단계에서 계획이 알려져 일제에 의한 의병장 고승천과 의병 김만석의 처형과 광양에 있던 창의소와 지휘부 급습에 의한 의병장 김석윤 체포 등으로 제주에서의 ‘1909년 3월 3일 의병항쟁’ 거사는 무산되고 말았다. 일제에 의해 내란죄로 기소된 의병장 김석윤은 광주지방 재판소에서 유배형 10년이 언도되어 옥고를 치르던 도중, 대구 송소원에 공소하여 제주유림의 노력으로 풀려난 후에도 평생 항일운동에 나섰다.

또한 그는 안봉려관 스님을 도와 관음사와 법정사 창건과 제주불교 최초의 선원인 월정사 창건에 기여하기도 했다. 항일 이력으로 이승(異僧) 혹은 운대사(雲大師) 등으로 알려진 김석윤 의병장에게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탐라기년을 쓴 석학 김석익은 김석윤의 친동생이다. 제주도는 1977년 의병항쟁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제주시 사라봉에 모충사를 세우고, 의병탑을 건립하여 고승천·김만석·김석윤·노상옥 등 의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한라산 둘레길.
한라산 둘레길.

▲항일운동 발상지 무오법정사 가는 길

제주도 지정문화재 기념물(제61-1호)로 지정되어있는 항일운동의 발상지 ‘무오법정사’는 서귀포시 중문동 법정악(어점이오름·해발 760m)의 깊은 계곡 품에 안겨 있다.

무오법정사 가는 길은 주로 1100도로를 통하거나, 영실에서 걸어서 ‘하원수로길’로 내려가거나, ‘한라산둘레길’을 이용할 수도 있으나,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일제에 의해 폐허가 된 상태로 보존되고 있는 무오법정사를 답사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기묘묘한 암석들로 가득한 계곡을 건너야 한다.

무오법정사를 답사한 여행객은 계곡을 다시 건너 출발지에 되돌아와서는, 오르막길을 올라 항쟁기념탑도 보고 안내표석 등을 읽으며 무오년 선열들의 넋을 모신 사당인 의열사로 향할 것이다. 의열사 참배를 마친 여행객은 덤으로 의열사 곁에 있는 한라산 둘레길에 들어서서는 이내 아름다운 계곡을 가로지르는 물길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길이 바로 ‘하원수로길’이다. 일제강점기와 제주 4·3, 6·25 전쟁 등의 아픈 역사로 인해 빈곤에 허덕이던 1950년대 후반에, 식량문제를 해결하고자 벼농사를 짓기 위해 하원동 마을에 논을 만들어 영실계곡에 흐르는 물과 언물을 하원 저수지로 보내기 위한 수로였다.

시멘트로 건설된 물길인 하원수로길은 또한, 한라산 도로가 생기기 전 한라산 등반코스이기도 했다. 근대농업유산인 하원수로길과 아름다운 풍광이 깃든 한라산 둘레길을 걸으며, 전국적으로 1919년 일어난 기미독립운동보다 5개월 먼저 제주에서 일어난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을 자랑스럽게 떠올릴 것이다.

무오법정사 항쟁기념탑.
무오법정사 항쟁기념탑.

▲일제에 의해 왜곡된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1910년 당한 경술국치 이후 전국적인 첫(?) 항일투쟁은, 치밀한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제주에서의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이었다. 그러나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은 일제당국에 의해 신흥종교로 알려진 ‘보천교 사건’으로 왜곡되게 알려졌었다.

그러나 최근 무오법정사 항일 무장봉기에 관련된 수형인 명부 등이 제주출신 연구자들에 의해 발견됨에 따라 일제에 의해 왜곡된 내용이 바르게 밝혀지기도 했다.

참고로 보천교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등 독립운동에 기여한 바도 있으나, 천자등극이나 재산과 헌금 강요, 혹세무민 등의 종교행위로 천도교 등 다른 민족종교나 지식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해체되었다가 광복 후 재건된 것으로 알려진 민족종교인 증산교의 일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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