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린 농민들의 민란…토호 세력에 경종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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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민란 주모자 이완평
이옥, 제주목사 역임…서귀포 포구 쪽으로 서귀진 옮겨쌓아
이완평, 부패한 탐관오리·토호 재물 몰수해 농민들에게 나눠줘
이왈종, 미술관 전시 수익금 기부 이어가…아너스클럽 가입
이우현, 최악의 대흉년 시기 곡식 풀어 굶주린 도민 구제 앞장
성읍리 태생의 이완평은 탐관오리와 토호의 비위를 성토하며, 민란을 일으켜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굶주린 농민들에게 나눠줬다. 이는 농민의 착취를 일삼던 토호들에게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됐다. 사진은 성읍민속마을의 풍경.(제주일보 자료사진)
성읍리 태생의 이완평은 탐관오리와 토호의 비위를 성토하며, 민란을 일으켜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굶주린 농민들에게 나눠줬다. 이는 농민의 착취를 일삼던 토호들에게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됐다. 사진은 성읍민속마을의 풍경.(제주일보 자료사진)

▲이옥李沃:생몰년 미상, 제주목사. 1589년(선조22) 10월, 목사 양사영(梁思瑩)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592년 3월에 체임되었다.

본래 홍로천(烘爐川) 위쪽에 축조되고 있었던 서귀진(西歸鎭)을 1589년 겨울 서귀포 포구 쪽으로 진을 이축하였다.

서귀성의 둘레는 825척, 높이가 12척으로 성에 오르면 남극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 있다고 해서 영주 12경(景)의 하나인 서진로성(西鎭老星)이라 불렀다.

성중에 샘물이 있고 성안에 객사와 군기고(軍器庫) 등이 있었으며 당시 조방장 1명, 치총(雉摠) 1명, 성정군(城丁軍) 133명, 방군(防軍) 75명, 주첨방군(州添防軍) 9명, 서기 7명, 방포수(防砲手) 1명, 국인(弓人) 3명, 시인(矢人) 7명, 그리고 사후선(伺候船) 1척이 배치되고 있었다. 또 1590년(선조23) 조천관(朝天館)을 중수하고 쌍벽정(雙碧亭)을 건립, 조천성은 석축이니 성 둘레가 428척 7촌, 높이가 9척 1촌이고 동쪽에 문이 하나 있었다. 조천진 소재지이니 성안에 연북정·조천관·군기고가, 동문 위에 초루가 있었다. 연북정은 객사라 해서 성 밖에 있던 것을 동성 위쪽으로 이설, 쌍벽정이라 개편(改扁)하였는데 10년 후 성윤문(成允文) 목사가 도임, 이 성을 중수하고 연북(戀北)이라 개편, 당시 진(鎭)에는 조방장 1명, 치총(雉摠) 1명, 서기(書記) 2명, 성정군(城丁軍) 132명, 차비(差備) 10명, 방군(防軍) 75명, 사후선(伺候船) 1척이 배치했다.

▲이완평李完平:?~1891(고종28), 민란의 주모자. 정의현 성읍리<정의-골> 태생. 본도 각처에 일본 어민이 침입, 행패가 심해지나 조정에서는 대책이 없고, 관리들은 직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평소 불만을 품었던 이완평(李完平·성읍 사람), 현계환(玄啓煥·남원읍 출신) 등이 1891년 2월 정의 지경에서 탐관오리를 성토하는 민란을 일으켰다.

이에 제주목사 조균하와 정의현감 마종문(馬鍾文)은 관군을 출동, 이를 진압하여 주모자 이완평 등 4명은 참수(斬首), 이어 현계환 등 8명은 경중에 따라 유배를 보냈다.

1896년(건양1) 12월 애월면 귀일촌(貴日村·하귀)의 선비 김지(金志)가 신구목사인 송구하(宋龜河)·조균하(趙均夏) 등을 규탄하는 민란을 일으킨데 자극받았다.

동년 8월 제주안핵사(按覈使) 박용원(朴用元·일명 박영훈)은 일본영사 하야시<林權助>와 같이 일본군인 140명을 인솔하고 내도, 일본인이 제주 사람 2명을 죽인 일에 대해 조사한 후 돌아갔다. 이와 같이 일본의 세력이 이 섬을 유린하는데도 방관하는 당국에 대한 저항이었다. 목사 조균하는 이 사건으로 책임을 지어 1891년 8월에 파직되자 떠났다.

♣1891년(고종28) 2월 ‘정읫-골’ 사람 이완평(李完平) 등은 민중집회를 열어 관리와 악질 토호들의 비위 사실을 성토하였다. 이완평은 모인 군중을 이끌고 농민을 착취한 토호의 집을 습격하여 재물을 몰수하고 그것을 굶주린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농민들이 모두 그의 의거에 박수를 보내고 그를 지지하였다. 당황한 것은 목사 조균하(趙均夏)였다. 마침 전 해에 김지(金志)의 난이 있었으므로 평소 대비했던 관군을 이끌고 곧 출동했다. 조직훈련된 군대 앞에 갑자기 모인 군중은 당할 수가 없었다. 이때의 ‘고종실록’을 보면 목사 조균하는 “정의현 무뢰배(無賴輩)가 작당하여 민간인을 구박하고 재물을 박탈하므로 괴수(魁首) 이완평 등 넷을 현장에서 죽이고 이에 가담한 현계환 등 8명은 정배(定配)하였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치밀한 계획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주동자들의 희생으로 쉽게 끝나버린 사건이었다. 그러나 농민의 착취를 일삼던 토호들에게는 경종을 울리며 쐐기를 박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성읍(城邑)마을은 민속(民俗)마을로 지정이 돼 보존되고 있다.

이왈종.
이왈종.

▲이왈종李曰鍾:1947년~생존, 미술가, 경기도 화성(華城) 출신이다. 추계(秋溪)예술대 교수로 지내다가 1990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서귀포에 정착했다.

서귀포시 정방동에 건립한 ‘왈종미술관’을 2015년 5월 31일 개관하면서 판화전(版畵展)을 함께 열었다. 판화전에서 얻어진 수익금 3000만원을 제주도에 사회복지기금에 기부했다.

또 이(李)화백은 2014년에도 이중섭(李仲燮)미술관에서 개최한 판화전의 수익금 3000만원을 유니세프 서귀포시후원회에 기부하기도 하였다. 이는 서귀포시가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의 여덟 번째의 협약(協約)도시가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자기 작품 대부분을 ‘왈종후원미술문화재단’에 등록시키고 있는 것은 비움의 실천이다.

이화백(李畵伯)은 “서귀포시에서 다양한 창작활동을 하면서 행복했다”며 “어려운 이웃을 지원하며 행복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2016년 4월 1일부터 6개월간 제주 서귀포시 소재 ‘왈종미술관’에서 ‘유니세프 영양 사업 후원 판화전’을 진행하고 지난 4일 전시 수익금 3000만원을 유니세프에 기탁, 총 누적 기부금 1억2000만원으로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로 구성된 ‘유니세프 아너스클럽’의 39번째 회원이 됐다.

▲이우현李禹鉉:생몰년 미상, 무신. 제주목사, 1794년(정조18) 10월, 심낙수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96년(정조20) 4월에 떠났는데 그 이유는 해마다 흉년이 겹쳐 도내의 호구가 감축되어 그 책임을 물어 경상도 의성(義城)에 좌천되었다.

1794년은 대흉년이 들어 속담에 “갑인(甲寅)년 흉년에는 먹다 남은 것은 물뿐이다.”라는 말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때 굶어 죽은 자와 도외로 빠져나가는 백성이 매우 많았었다. 그는 내도하면서 계청하여 이전미 1만 2000석, 내수미 1345석, 조(租) 2275석, 보리 6555석을 선박 17척에 분재(分載)하여 운반, 도민을 진휼하였다.

또 자비곡 보리 316석으로 진휼에 보태었다. 1784년(정조8) 이후 환곡하지 못한 곡식이 4727석 있었는데 이를 조정에 알려 면제시키도록 노력했다.

1795년 봄 조정에서는 내탕금(內帑金) 10만 5000냥을 보내어 관찰사로 하여금 조(租)로 교환하여 진휼에 보태도록 하였다. 이는 정의현감 남수(南)의 소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동년 가을에 자비곡 1430여석으로 진휼하는 등 힘썼으나 갑인년 대흉년의 폐해가 막심하여 도류인구(逃流人口)가 많아 결국 파직되고 말았다.

이에 앞서 의녀 김만덕(金萬德)의 구휼 사업을 조정에 보고하여 그녀로 하여금 서울과 금강산을 구경하게 하였다.

목사 이우현은 계청(啓請)하여 이전미 1만2000석, 내미 1345석, 조 2275석, 보리 6555석 등을 배 17척으로 실어 와서 베풀고 자비곡자비곡 316석(보리)으로 애월읍을 비롯해 전도에 진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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