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전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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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아파트 현관을 나선다. 18층에서 바라만 보던 푸르른 풍경이 향기로 다가서는 순간이다. 마스크를 벗을까 말까? 거리두기 완화 조치로 탈脫 마스크가 허용된 5월인데 나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신록의 향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인다. 이런 나약함은 코로나19가 2년 여간 나의 몸과 마음을 지배한 때문이다. 그래도 마음을 가렸던 마스크만은 단번에 벗어버린다. 온몸의 세포가 살아난 듯 사방 천지에 기득한 봄날의 온기기 달려든다. 가슴을 펴고 힘껏 발걸음을 내딛는다. 내가 가려는 길의 끝에는 수개월간 침묵에 잠겨야 했던 교회가 문을 활짝 열고 기다릴 것이다. 거의 1년 여 만에 다시 찾는 길목의 갈림길에서 잠시 멈춘다. 도로로 갈까 천변으로 갈까? 선택해야 한다. 곧게 뻗은 도로는 신호등을 기다리는 번거로움이 있고 개울가 산책로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불편함이 있다. 십 수 년 간 주일마다 다녔던 익숙한 길인데도 갈래 길 앞에만 서면 어떤 길을 택할지 주저하게 된다. 1년여의 공백을 거쳐도 여전하기에 피식 웃으며 계단을 택한다. 녹음방초를 품은 천변의 풍치는 싱싱한 풀 향과 새들의 지저귐과 물소리가 어우러진 공연장이다.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풍광이 새삼스럽다. 이처럼 아름답고 신비한 세상에 머무는 복을 제대로 누렸는지, 자연과는 얼마큼이나 친숙하게 굴었고 자상하게 살폈는지 자신을 돌아본다. 아마도 빛의 속도로 생활한다면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바람을 보며 빛을 만지고 신의 존재를 확인한다면 그럴 수 있다면…… 허술하게 대했던 마음을 달래려고 뜬금없는 생각을 해본다.

생명의 근원은 공기나 의식처럼 형상화 될 수 없는 무형으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우주를 채운 공기를 거리낌 없이 마신다. 호흡처럼 쉬운 게 없다며. 하지만 코로나를 통해 숨쉬기가 힘들다는 것을 보았다. 저절로 쉬는 호흡이 아니다. 아무리 공기가 많은들 의식이 깨어있지 않으면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우리 몸을 지탱하는 힘은 무한한 사고思考와 판단으로 점철된 의식일 게다. 신체 어디에 이런 오묘한 섭리가 숨어있는지 경이롭다. 그럼에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귀중한 신체를 볼품없다고 투정하고 유한한 인생인 걸 잊고 사소한 일로 고민하고 갈등하던 지난날을 돌이켜 보며 지금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감사가 넘친다.

교회가 가까워진다. 잡다한 생각을 정리하며 줄지어선 나무들이 만든 녹음 속을 걷는다. 여름을 준비하며 푸른 잎을 키워 그늘을 제공하는 싱그러운 나무를 닮고 싶다. 나무처럼 조용히 하늘을 우러르며 기도를 준비하는데 저 멀리 다리 위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 폭의 풍경화로 비쳐진다. 배경이 된 신록과 파란 하늘과 흰 구름, 반짝이는 교회 탑과 그곳을 향한 영혼들. 가슴이 벅차다. 너무 오랜 시간을 참았던 발걸음들이다. 풍경 속에 들어있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그들 속에 끼려면 부지런히 다리 밑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된다. 걸음을 빨리하는데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속삭인다. 뭐가 급하니?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아. 빨리 가려고 뛰면 아름다운 풍경을 놓칠 거야. 물은 한곳으로 흐르지만 흘러가는 물은 매양 다르다네, 지금 내 앞에 놓인 것이 가장 귀하고 값지다는 것을 잊지 마.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한가롭다, 냇가의 연두 빛 버들가지가 파도처럼 일렁이고 초록 생명을 품은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풍광이 멋져 사진을 찍어보지만 마음에 안 든다. 나는 보고 싶은 것을 골라 확대해 볼 수 있지만 카메라는 사각 프레임 안에 든 것만 충직하게 담아내는 것이니 탓하지 말아야 한다. 카메라를 집어넣고 마음으로 감상하리라.

5월 투명한 정오의 햇살이 따갑다. 슬쩍 마스크를 벗는다. 싱그러운 바람이 코끝을 맴돈다.

연두 바람이 말을 건다. 이 좋은 날에 시를 쓰고 싶지 않아? 그림은? 일기도 좋겠지.

나는 대답한다. 응, 그러고 싶지만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다른 마음은 안 품을래.

참 감사한 날이다. 살아있음에. 느낄 수 있음에. 기도할 수 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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