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와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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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수, 리쓰메이칸대학 명예교수/ 논설위원

지난 6월 23일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벌어진 오키나와전(沖繩)이 종결된 지 77년째를 맞는 날이었다. ‘위령의 날’로 정해진 이날, 오키나와 이토만(糸満)시의 평화기념공원에 건립된 ‘평화의 초석(礎·이시지)’에는 희생자 유족들의 추도 행렬이 이어졌다, 같은 날에 치러진 추도식전에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나 중·참 양원 의장들도 참석했다.

오키나와는 전쟁 당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다수의 일반 주민을 말려들게 한 지상전이 벌어진 땅이다. ‘철의 폭풍’이라고도 불린 미군의 육해공 동시 포격으로 인한 희생과 더불어, 굶어 죽거나 말라리아 감염에 의한 희생도 허다했다. 1만여 명의 미군의 희생에 대해 일본 측의 희생은 18만8000여 명으로 그중 절반은 일반 주민이었다. 오키나와 출신의 군인을 포함하면 오키나와 주민에 4분의 1이 희생된 셈이다. 압도적인 미군의 공세에 몰려 광기에 사로잡힌 일본군은 ‘군관민 공생공사(共生共死)’라는 방침에 따라 주민들에게 ‘집단자결’을 강요하기도 했다.

오키나와전으로 인한 희생은 일본인과 미국인뿐만 아니었다. 위의 평화기념공원에는 ‘한국인위령탑’이 건립되어 있다. 전시 오키나와에는 군부(軍夫)나 징용공, 혹은 위안부로서 많은 조선인이 끌려가면서 전쟁에 동원되어 희생되었다. 2015년 한국의 강제동원위원회가 오키나와 피해자 신고를 받은 결과 사망 517명, 실종 157명, 생환 1919명, 후유증을 겪는 사람이 51명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는 최소한의 수치일 것이다. 조선인 희생자의 정확한 수치는 아직 연구가 미진하지만, 어느 역사학자 (林博史·하야시 히로시)는 “적어도 몇천 명에서 1만 명 이상 (의 조선인)이 희생되었다고 추측된다”라고 분석하고 있다.(沖縄戦うもの大月書店

오키나와에 끌려간 조선 청년은 군부로서 진지 구축 등 노역에 시달렸다. 일본은 본토 방어를 위한 전진기지로 오키나와에 대규모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많은 병력과 군부를 집결시켰다. 조선인 군부는 미군 폭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희생되거나 부대를 탈출하다 일본군에게 사살된 조선인도 적지 않았다. 위안부로서 오키나와에 끌려간 조선인 여성들이 야전병원에 배치되어 간호 임무에 종사하다가 희생된 사례도 있다.

오키나와전 시작 직후인 4월 8일 일본 육군은 7개 방면에서 본토 결전에 대비할 <결호(決号) 작전준비 요강>을 발령했다. 제주도는 <결7호>로 작전준비가 추진되었다. 제주도가 오키나와를 뒤잇는 본토 결전의 중요거점으로 간주되면서 8월에는 4개 사단 반(8만4000명)이나 되는 병력이 결집했다. 아울러 항공기지, 지하호, 해상특공기지 등의 군사시설이 남서부를 중심으로 전도에서 구축되었다.

그 당시 일본군은 제주에 상륙하는 미군의 병력을 2∼5개 사단, 상륙 시기는 9∼10월로 예측했다. 일본군은 미군이 상륙하면 해안선이나 동부중산간 지대는 포기하고, 남서부의 중산간 지대에서 주민을 말려들게 하는 장기전으로 끌고 갈 작전이었다. 전쟁이 한 달이나 두 달 오래 끌고 있으면 오키나와전의 비극이 제주 땅에서 재현되고 말 지경이었던 것이다.

1945년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로의 원폭투하와 더불어 (구)소련의 대일전 참전(8일)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일본이 패망하면서 제주도는 참담한 전쟁 터가 되기를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참전은 동아시아의 냉전·분단으로 이어지고, 제주도가 4·3이라는 또 다른 광기에 휘말리는 길을 열게 된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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