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부동·견리사의 정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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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호, 21C제주유교문화발전연구원장/수필가

세상은 정겨운 인간성을 가진 사람을 원한다. 한편 지성을 가진 사람이 훌륭한 것은 맞지만 한쪽으로 기울어진 사람은 변통을 모른다. 그런데 유교의 인간관은 물질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가 조화되어 실현될 때 이상으로 여긴다. 곧이곧대로 세상을 사는 것만이 대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는 도덕적 가치관에는 물질적 가치가 적당히 섞여 있어야 하고 물질을 강조하는 가치관에는 도덕적 가치를 충족 시켜주어야 한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물질적 가치에 해당하는 개념을 이(利)로, 도덕적 가치에 해당하는 개념을 의(義)로 설정하고 있다.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이 고도화할수록 도덕의 필요성은 더더욱 강조된다. 유교의 인간관에서 이상적인 가치실현은 바로 이러한 이(利)와 의(義)의 조화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공자는 ‘견리사의(見利思義·이득을 보면 도리에 맞는지 먼저 숙고하라는 뜻)’를 삶의 좌우명으로 삼으라고 했다. 즉 의(義·옳고 그름)로써 이(利·득실)를 삼으라는 말이다.

공자의 수제자 자공(子貢)이 물었다. “선생님, 마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거나 또는 모두 미워하는 사람이면 어떻겠습니까.” 이에 공자는 “그것만으로는 좋지 않다. 마을의 착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을의 나쁜 사람들이 미워하는 그런 사람이라야 한다”고 대답했다.

논어 자로편 23장에 ‘군자는 화동(和同)하고 뇌동(雷同)하지 않는다’(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는 구절이 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란 남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하지만 맹목적으로 어울리지 않으며 다양한 의견을 듣고 조율과정을 거쳐서 조화로움을 추구한다는 의미다. 또한 자기만족을 채우기 위해서 도리를 져버리거나 남에게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는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즉 군자는 다른 사람과 화합은 하되 자기의 중심과 원칙은 견지한다는 말이다.

반대로 동이불화, 겉으로는 화합하는 척 하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 정의롭지 못하고 줏대 없이 행동하는 소인배들이 이에 속한다. 이러한 사람은 부화뇌동하며 남을 부추기는 행위를 일삼을 뿐만 아니라 화합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군자는 합당한 예(禮)로써 접근하면 언제든지 환대한다. 그러나 소인은 편당을 이루기 좋아하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지 못하지만 금품이나 잔꾀로 달라붙으면 마음이 변하는 특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선비는 지식인이다. 그들에게는 학문도 중요하지만 행동할 줄 아는 실천가라야 한다. 아무리 깊은 학문과 높은 식견을 지녔다 해도 실천이 없는 사람은 선비가 아니다. 융통성이 없으면 그것은 옹졸한 선비라는 것이다. 욕망의 대상, 어디 돈뿐이겠는가. 권력의 독점욕은 더 무섭다.

6·1 지방선거가 끝났다. 새로 출범하는 공 기관, 단체는 본연의 일상 업무에 매진해야 할 때다. 정의가 살아있고 진실이 바로서는 사회, 더불어 함께하는 지역사회발전에 빅 텐트를 펼쳐야 한다. 이것만이 도민통합과 복지구현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화이부동, 오직 견리사의 정신에서만 우러나온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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