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월 그리고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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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진 수필가

잎들이 모도록하게 모여 한 송이 꽃을 연상시키는 다육 식물. 용월이라는 다육도 꽃보다 잎이 더 예쁘다. 비둘기 빛이 도는 도톰한 잎들이 화분 가득 풍성한 자태를 뽐내고 있으면 마치 꽃 무더기가 피어 있는 듯하다.

용월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갸우뚱한다. 방울복랑, 녹비단, 청옥, 바위솔 등처럼 그 모습과 어울리는 이름을 붙였으면 좋으련만…. 목대를 길게 뻗은 이 우아함에 이름이 ‘용월’이라니. 나만의 억지를 부린다면 잘 차려입은 정장에 고무신을 신은 느낌이랄까. 서로 녹아들지 않은 어색함에 용월, 용월하며 입안에서 굴리는데, 문득 친구 중에 ‘용월’이라는 이름을 가진 애가 떠올랐다.

단발머리에 눈이 작고 목소리가 걸걸했던 용월이.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지 2학년 때이었는지 가물가물하다. 그만큼 용월이는 눈에 띄지 않은 아이였다. 공부를 잘하거나 예체능에 뛰어난 것도, 외모가 눈길을 끌어 부러움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냥 출석부 중간 정도에 있어 그 애나 나나 존재감이 없기는 그만그만했던 것 같다.

가끔 몇몇 중학교 동창들과 만나 수다를 떤다. 그럴 때마다 으레 나오는 화두 하나가 ‘그 친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이다. 애석하게도 용월이 이름은 입에 오른 적 없다.

친구 용월은 기억 저편에 잊힌 채로 있었지만, 다육 식물 중 용월만큼 나의 애정을 받고 있는 게 있을까. 머리 둘 곳만 있다면 아무 데서나 꿀잠 자는 사람과 닮은 용월. 발붙일 흙 조금만 있으면 소라 껍데기나 돌구멍 사이도 괘념치 않는다. 어떤 곳에든 잎 하나를 뚝 떨어뜨리고 놔두면 며칠 뒤 배냇니처럼 돋은 새순에 감탄하게 된다. 그 무던함이 나를 사로잡는다.

키우기 쉬운 용월과 달리 예민한 다육들도 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생생한 꼿꼿함은 이런저런 이유로 점점 맥을 못 추다 사그라진다. 그러다 어느 날 비어있는 화분과 맞닥뜨린다. 아쉬움이 머문 자리에 용월을 대신한다.

빈 화분을 메우는 다육 용월처럼 나의 결핍된 부분을 채워주는 친구가 있다. 다리에 장애가 있어 산행과는 거리가 먼 나. 그런 나를 위해 그 친구는 산과 오름을 오를 적마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보내온다. 구불구불한 숲길, 수줍게 핀 꽃들과 나무들, 정상에서 바라본 탁 트인 풍경.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상상한다. 가쁜 숨 몰아쉬며 걷고 있는 나와 친구를. 목표지점에 다다른 순간 펼쳐진 장엄함에 환호성을 지르는 장면을. 사진 속 어딘가에 내 발자국도 은근슬쩍 새겨 본다.

지난봄엔 입 호강도 했다. 산에서 곰취랑 쑥을 뜯어 장아찌와 인절미를 만들고 왔다. 네 것 먼저 덜어 한 걸음에 달려왔다며 들고 온 음식을 풀어헤친다. 나보다 더 나를 챙기는 친구. 오롯이 그 마음이 전해와 쑥 향에 코끝이 찡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선한 기운이 삶은 혼자가 아니란 걸 일깨운다. 나의 부족함이 누군가에 의해 충족되었을 때, 우리는 상대에게 위로를 받는다. 혹여 익숙하다는 이유로 내가 받는 배려들을 당연하다 여기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할 때 소중함을 잃게 되니까.

예쁜 화분 하나를 고른다. 다육 용월을 심고 용월처럼 내게 힘을 주는 친구에게 선물할 생각이다. 소중한 것은 어느 드라마의 명대사처럼 ‘추앙해’야 한다. 그나저나 내 친구 용월이는 잘 지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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