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유월 스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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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자

행사 준비가 한창이다. 육류를 파는 진열대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있다. 부위 별로 손질된 재료에 눈이 멈춘다. 소비자들은 닭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듯하다. 옛 풍경들이 아스라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어머니와 벗하여 오일장에 다녀오는 일이 많았다. 여느 장날보다 북새통이었다. 통통한 암탉 한 마리가 마당 한구석에 터를 잡았다. 닭은 벌을 받는 것처럼 나무와 연결된 줄에 한쪽 다리가 묶였다. 날아보려다 털썩 주저앉기를 반복하다가, 한 자리만 뱅뱅 돌아야만 하는 자유롭지 않은 몸이었다. 생의 마지막 날이 언제임을 모르는 터.

평소 인자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온데간데가 없었다. 한창 놀고 있는 닭 목을 비틀었다. 축 늘어진 목을 보니 목숨이 다했구나 싶었는데, 다시 뜨거운 물에 데쳐 나온 가련한 신세였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털은 몸에 착 달라붙었다. 아버지가 털을 뽑기 시작하자 차마 그 상황을 쳐다볼 수 없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제주에서는 음력 유월 스무날을 ‘독 잡아먹는 날’이라 했다. 여름을 나기 위한 연례 행사였다.

마당 한 켠 두레상에 삶은 닭 한 마리가 올라왔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살점을 뜯어 주느라 손놀림이 분주했고, 양손은 노르스름한 닭기름으로 번들거렸다. 내 몫은 항상 기름지지 않고 뼈가 없고 부드러운 가슴살이었다. 음식을 탐하지 않아 몇 점 먹고 물러서려는 나를 보곤 아쉬운 눈짓을 보냈다.

으뜸인 닭 다리는 오빠와 큰동생에게 주었을 성싶다. 아버지는 뼈에 붙어 있는 살을 깨끗하게 먹지 않았다고 타박하기도 했다. 가장이었지만 닭 다리는 언감생심이었다. 자식들이 먹다 남긴 살점과 물렁뼈를 드시며 맛나다고, 우리가 상을 물린 후에도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살이 거의 없는 계륵과 닭 껍질로 배를 채우셨다. 계륵을 드실 때는 삼국지 이야기가 등장했다. 더위가 오기 시작하면 입담 좋게 고사성어까지 읊던 아버지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한 마당에 살던 새댁이 슬쩍 말을 던졌다.

“에게, 닭 한 마리로?”

우리는 여섯 식구, 새댁네는 단둘이었다. 닭 한 마리가 우리 가족에게 모자란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리 없어 보였나 하는 생각에 한 세대가 지났음에도 새댁이 한 말이 가슴을 훑고 지나가곤 한다. 어머니는 죽을 끓인다는 핑계로 부엌에 계셨던 것 같다. 함께 앉으라고 하지 못한 철부지들이었다. 자식들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고, 배불기만을 바라던 우리 부모님들의 초상이 아니겠는가.

남편도 제주의 풍습이 몸에 배어 있었다. 삼계탕집에서 편하게 먹을 수 있었지만, 닭 한 마리 사다가 아이들과 저녁으로 먹자고 했다. 중닭 한 마리면 충분했다. 닭 삶는 시간이 길어져 작은 아이가 부엌을 왔다 갔다 했다. 거의 상차림이 되어 갈 무렵에도 또 다녀갔다. 밥 먹을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내 닭 다리가 아니잖아.”

개인 접시에 놓았던 닭 다리가 바뀌었음을 알아차려 버린 것이 아닌가. 내가 작은 아이가 다녀간 후 약간 크게 보이는 닭 다리를 큰 아이 접시로 옮겼다. 어린 눈에도 이미 닭 다리 크기를 가늠하고 있었다. 닭 다리 소동이 일어났다. 무슨 영문인지 모른 큰애는 울상이 된 동생에게 자기 것을 내주었다. 지켜보던 남편이 말문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번갈아 먹을 거다.”

“아빠와 엄마도…”

화기애애해야 할 저녁 식탁에 냉랭한 기운만 감돌았다. 각자 말없이 고픈 배만 채우고 있었다. 닭 다리는 늘 아이들 몫이었다. 내가 정한 우리 가족만의 법이었다. 아이들만 챙겼던 것이 늘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어쩌겠는가. 그게 어미 마음인 것을….

음력 유월 스무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천상에 계신 아버님과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어머니 생각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다리가 네 개 달린 닭이 있었으면 그런 소동은 없었겠다 싶어 피식 웃음도 나왔다. 장을 보다가 옛 풍경화 꺼내어 칠했다 지웠다 하고 있다.

이젠 닭 다리 하나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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