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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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선

12월, 광화문의 건물 사이로 거침없이 몰려다니는 바람은 무척이나 매섭다. 마음 한쪽에 늘 자리 잡고 있다가 불쑥 생각날 때면 전화를 주고받았던, 내가 형님으로 부르던 이를 만나기로 한 동지다. 손수 쑨 팥죽이 담긴 통을 들고 버스에서 내리는 형님의 희끗희끗하고 숱 없는 머리카락이 힘없이 날린다.

‘나는 참 독한 사람인가 봐.’

식어버린 죽 한 그릇을 앞에 두고 마주 앉으며 혼잣말처럼 툭 던지는 첫마디에 눈물부터 핑 돈다.

형님과의 인연은 벌써 20년이 지났다. 제주살이를 시작하면서 만난 그분과는 열 살 정도 나이 차이가 났지만, 어린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다. 신심이 깊고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며 뿌리 깊은 나무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걸을 수 있게 되면 아니, 휠체어에 앉을 수만 있어도 성지순례를 다니자고 약속을 했어요.”

그런데 그 약속을 한 번도 지키지 못한 남편의 부재 앞에서 눈물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문상객으로 앉아있는 친지들에게 민망할 정도로. 칠 년 동안의 긴 시간, 의식이 사라진 남편 곁을 지키며 마음 단속을 단단히 하고 있었을 형님이 그려졌다. 약해지면 안 된다고 여러 겹의 단단한 옷을 껴입었을 그분의 마음이 오롯이 읽혔다.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같이 울었다.

24년 전 예순도 되지 않은 나이에 ‘남편’을 떠나보낼 때의 엄마가 떠오른다. 나는 엄마의 눈물을 본 적이 없다. 자식들 앞에서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단호한 결심을 해서일까. 나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빠져 엄마를 위로해드릴 여유가 없었다. 엄마도 형님처럼 마냥 목놓아 울 수 없었으리라. 슬픔을 꾹 참아 누르는 모습이 떠올라 마음을 아려온다. 한낱 울음으로, 눈물로 남편을 먼저 보낸 그 슬픔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을까.

어버이날이 되면 카네이션 한 송이와 우리가 드린 용돈을 흰 봉투에 담아 양복 호주머니에 반듯하게 꽂아두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지도, 무엇하고 계시느냐고 묻지도 못했다. 안방에 걸려있던 아버지의 양복 한 벌. 엄마는 그곳을 향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성지순례를 해요. 사진 한 장을 가지고. 남편과의 약속을 이렇게라도 지키고 싶어서요.”

사랑하는 사람을 추억하며 힘겹게 내딛는 발자국마다 담겨있을 기도는 신께 고스란히 전해지겠지.

“이제는 글을 쓰고 싶어요.”

커피를 마시다 말고 툭 뱉은 한마디 말에 괜히 마음이 뜨거워진다. 어쩌면 엉켜버린 실타래를 천천히 풀어내어 한 올 한 올 뜨개질하듯 글을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다친 마음들이 조금씩은 나아지겠지. 정말 좋은 생각이라며 가까운 서점으로 이끌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쓴 수필집 한 권을 사서 형님께 건네주면서 다시 한번 꿀꺽 눈물을 삼켰다.

스물네 번째의 겨울들을 홀로 보내고 맞는 엄마에게도 눈물은 어쩌면 사치스러운 것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차가운 바람 앞에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서 있는 나무. 그 속에 이렇게 많은 주름이 숨겨져 있을 줄 몰랐다. 남은 한 장의 이파리까지 모두 떨어낸 나무가 외롭고 추워 보인다.

홀로 서 있는 큰 나무 아래 한참을 앉는다. 숱하게 많은 계절을 겪어 내었을 나무. 싹을 내느라, 열매를 맺느라 고단했을 은행나무의 수피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물기라고는 전혀 없는 거친 살갗이 아프게 전해진다. 엄마의 갈라진 발꿈치 같기도 하고 윤기 없는 손바닥 같기도 한. 연초록의 봄날과 황금빛 찬란한 가을을 지나고 마지막 남은 이파리마저 떨어지고 난 후에서야 우뚝 선 나무가 제대로 보인다. 슬픔이 지나간 곳마다 움푹 패여버린 상처투성이의 나무. 그 사이로 바람이 분다. 영혼을 깨우는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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