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궂이를 함께 할 이가 있어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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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완,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

“하늘 아래 모두가 아름다운 줄로 알아 아름다운 것으로 삼는 것은 미운 것이 있어 그렇다. 모두가 잘난 줄로 알아 잘난 것으로 삼는 것은 못난 것이 있어 그렇다.” 너무 당연하고 평범한 말이라서 오히려 어렵다. 세상 모든 것은 본래 비교급(比較級)이다. 이것은 “이것이 아닌 저것”과 비교해야 그 정체가 드러난다. 그렇게 정체가 드러나야 이것인 줄로 알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이것”이 된 것은 적어도 저것과 구분될 정도의 다름, 곧 “정체성”이란 걸 유지해야 한다. 그럴 때만 “이것”임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경 2장에서는 뜬금없이 “하늘 아래 모두(天下皆)”, 곧 보편성을 소환한다. 늘 똑같은 길도, 똑같은 이름도 없다고 선언해놓고서는 “하늘 아래 모두”가 아름답고, 잘난 줄로 아는 것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다양하게 번역된다. “하늘 아래 모두가 아름다운 줄로 아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추한 일이다.”라거나, “천하 모두가 알 듯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은 추악할 따름이다.”라고 말이다. “바라는 게 있고 없는데 따른 세세한 차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이지만, “대세가 문제”라는 인식은 공통된다.

도가와 도교가 공자와 유교를 비판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도덕경에서 공자와 유교를 드러내놓고 비판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당시 어리숙한 사람들이 공자와 유교에 쏠리는 것을 막으려고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다. 노자는 일상을 벗어나 신선이 노니는 피안으로 가자고 손을 끌지 않는다. 오히려 잘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꾀는 사람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까발려” 준다. 그래서 초월을 말하는 대신 일상에 눈 돌리게 하고, 힘이 들어도 그것과 마주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한다.

중구삭금(衆口鑠金)은 요즘 말로 “여론은 쇳덩이도 녹인다.”라는 뜻이다.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내야 한다.”라는 말은 모두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된다는 말과 통한다. 그렇다고 민주주의가 우민정치로 끝날 위기에 놓였다고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도 정치적 구호요, 수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사고의 대전환”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구호가 평범한 일상을 뒤흔들어 놓을 것을 염려했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것, 곧 조작된 여론이 민심을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잊힌 말이 되었지만 “엄친아”라는 말이 유행했다. “엄마 친구 아들”과 비교당한 많은 “엄마 현실 아들”에게 좌절을 안겨준 말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비교 대상이 되는 나 없는 엄친아는 의미 없다. 덧붙여 그 누군가에게 나도 “엄친아”로 불린 일이 적어도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부정적인 어감과는 달리 “날궂이”라는 말은 “궂은 날씨에 음식과 이야기를 나눈다.”라는 멋진 뜻을 가지고 있다. 쾌청한 날만 있는 것도,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느닷없는 비바람, 오래 가는 비 날씨가 달가울 건 없다. 그래도 날궂이를 함께 할 이가 있는 날은 아름답고 좋은 날이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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