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먹는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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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자

바람의 언덕에 섰다.

몸조차 가누기 힘들어 쓰러질 것 같은데, 풀들은 유연하게 누웠다 일어났다 무한 반복을 한다. 바람에 몸을 맡기면 저리 자유스러운 것인가.

바람과 돌과 여자가 많다는 삼다의 섬에서 태어나 칠십을 바라보고 있으나, 여전히 바람 앞에선 버겁다. 두 발로 힘껏 땅을 딛고 굳건히 버티어보려 해도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다.

제주의 바람은 바다에서 일어나 들로 오름으로 산으로 오른다. 갯바위에 세차게 부딪히며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는 파도는 바람을 등에 업고 소리쳐 운다. 섬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갯가에 자라는 모든 나무의 가지를 한 방향으로 뻗게 할 정도로 강렬하고 냉엄하다. 섬에 사람이 살기 이전부터 불고 있던 원초적인 바람은 그대로 섬이 된다.

폭풍의 화가 변시지의 작품은 그 바람의 울음소리가 고독한 메아리로 절절히 울려 퍼진다. 쓰러져가는 초가집과 휘어진 한 그루의 소나무와 말 그리고 한 남자의 모습이 바람의 소용돌이 속에서 흔들린다. 황갈색 바탕에 검은 선으로 그려진 작품의 주인공들은 인위적인 것에 물들지 않은 본연의 것 그대로를 추구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삶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그래서인가, 여러 번 마주하는 그림이지만 그 앞에 서면 가슴으로 구멍 숭숭 뚫고 들어오는 바람을 느낀다.

제주 사람으로 태어나 십 대를 육지에서 보냈다. 낯설고 물설다는 말을 어른들이 했지만 도통 무슨 뜻인지 몰랐다. 집에서는 제주 사투리를 쓰면서, 학교에 가면 서툰 표준말로 필요한 말만 하며 말 없는 아이가 되었다. 백록담에서 공을 차면 바다로 떨어지는지를 묻는 부산 아이들에게 섬에서 온 나는 그냥 신기한 존재였다. 말을 걸어오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쉬 친해지지 못했다. 제주 것도 육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소속감에서 오는 외로움이 커갔다.

황토색 바람 속에는 언제나 혼자 외로이 서 있거나, 홀로 앉아서 먼바다를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다. 구부정한 어깨와 지팡이를 짚은 작품 속 남자는 누구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일까. 캔버스 앞으로 다가와서 자신과 대화를 나눠달라고 하는 것인가.

외로움의 섬 속에 갇혀 자신의 운명을 바람에 내맡긴 사람. 그는 작가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다.

십 대에 심어진 외로움의 뿌리는 깊었다. 외로움은 내 성격의 일부로 굳어지면서, 사람을 쉽게 사귀지 못했고 사는 게 고달팠다. 중년에 접어들 무렵, 집안에 불어 닥친 갈등과 시련의 바람은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온 실낱같은 신뢰마저 무너뜨렸다. 홀연히 떠나버리고 싶었던 나날들…. 바람에 흔들리며 이만큼 살아보니, 닥쳐올 위기는 폭풍전야의 고요함처럼 미리 예견되는 무언가가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멀리 수평선이 춤을 춘다. 바다 위에 외로이 흔들리는 조각배와 바람에 휘어지는 소나무 아래서 말고삐를 잡고 바람에 맞선 채 서 있는 남자. 내부가 비어있는 초가집. 모든 걸 비워버린 속내를 보여주듯, 가진 게 없으니 감출 것도 없는 삶이다.

가끔 허한 속을 달래려고 찾아오는 바다가 보이는 언덕. 이 언덕에 서면 멀리서 하얀 거품 일으키며 밀려오는 파도를 원 없이 본다. 하늘이 파랗게 맑은 날은 바다도 맑고 잔잔하다. 그러다가 어느새 바람이 몰아치면 순식간에 바다는 흰 거품을 물고 용트림을 한다.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이 속앓이하다 끝내 통곡하듯이, 파도는 거대한 몸짓과 소리로 속을 드러내며 운다.

바람 부는 이 언덕에 서서 저 파도처럼 소용돌이치는 내 안의 나를 다독인다. 폭풍의 길목인 섬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바람에 흔들리며 살아가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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