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사회의 여름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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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 서울과학종합대학원 특임교수/ 논설위원

‘어머니와 아들은 제일 비싼 도가니탕을 시켰다. 늙은 어머니는 연신 아들의 뚝배기에 도가니를 건져 넣는다. 더 먹어라. 어머니 드세요, 자주 오겠습니다. 얼핏 아들의 얼굴에 울음의 그늘이 스친다. 차차 익숙해지실 거예요. 조심해서 올라가거라. 사랑과 불효의 무게가 같아서 서러운 어머니와 아들.’ 김초혜 시인의 '요양원 앞 식당 소묘' 전문이다. 무조건적 사랑과 결과적인 불효가 교차하는 이 순간을 무어라 할 수 있을까.

나 또한 아침마다 백세 어머니를 요양원의 주간보호에 보내드린다. 집에서 혼자 지내는 것보다 여러 노인들과 하루해를 함께 보내는 게 나으리라 생각돼서다. 아니다. 사실은 어머니와 지리한 시간을 붙들고 샅바 싸움을 하듯이 버티는 매일이 힘들어서다. ‘오늘이 며칠이냐’를 반복해서 물으시고, 아무데나 침을 뱉고, 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밥을 일일이 떠먹여야 하고, 버리거나 흘리는 것들을 좇아 다니다 보면, 하루해가 기운다. 어머니와 나에게 주어진 하루가 야속할 따름이다. 요양원 선생님들의 수고로움이 저녁노을을 타고 강물처럼 흐른다 .

지난주에는 주간보호로부터 ‘어머니가 이상하니 모시고 가라’는 연락이 왔다. 헐레벌떡 달려가 보니, 눈을 감으신 채 직원 손에 이끌려 나오신다. 아침부터 점심까지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주무시기만 하신다니…. ‘어머니 눈 떠봅서!’를 외치면서 병원으로 달린다. 가슴이 먹먹하다. ‘할머니가 이상하다’는 간호사의 말에 의사의 표정도 예사롭지 않다. ‘아무래도 입원을...’이라는 말에 임종의 예고가 느껴진다.

다행히 ‘우리 어머니 부디 여름을 잘 보내고, 밀감이 황혼처럼 들판을 물들일 때, 기분 좋은 가을바람에 실려서 천국 가게 하소서’라는 나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을까? 주사실로 옮겨 가서 링겔을 맞은 어머니가, 서 너 시간만에 거짓말처럼 눈을 떴다. ‘집으로 가자’는 어머니의 첫 마디가 기적처럼 가슴을 울린다. 그렇게 돌아오신 어머니가 오늘은 기운차게 보말을 까신다. 당신의 생애 중에서 강원도로 원정 물질을 다닌 것이 최고의 무용담인 어머니는, 바닷내음이 느껴질 때면 눈빛마저 빛난다.

어쩌면 여름철만큼은 피하고 싶은 게, 부모를 모시고 사는 집들의 오래된 소원일 거다. 하지만 보험개발원의 통계에 의하면 젊은 사람은 여름에, 나이 든 사람은 겨울에 사망할 확률이 높다. 젊은 층은 자살과 재해, 노인층은 암과 같은 질병에 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립기상과학원의 조사에 의하면 폭염 사망자 11명 중 6명이 65세 이상이다. ‘악마는 항상 꼴찌부터 잡아먹는다’는 말처럼 노인의 취약성을 환기시키는 얘기다.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2020년 현재, 남자 80.5세, 여자 86.5세, 평균 83.5세다. 하지만 장수사회의 불편한 진실은, 늘어난 수명만큼 ‘인생의 5분의 1, 평균 17년을 질병에 시달리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더욱이 전체 사망자의 76%는 요양병원을 포함한 의료기관에서 죽는다. 소위 친절한 죽음은 집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하는 것이다. 죽음에도 계획이 있다면 가능한 일이리라. 얼마 전 작고한 이어령 선생의 경우를 보면, ‘죽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봐야겠다’며 허공을 응시하다 숨을 거둔다. 내가 느끼는 죽음은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이라는 그분의 눈물 한 방울이 어머니의 여름에 은혜로 스며든다. 아, 그러고 보니, 여름은 생명의 시간이 아닌가. 올해는 칸나가 유난히 붉다. ‘행복한 종말’이 꽃말이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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