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라는 숫자
나이라는 숫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안혜주 수필가

가끔 성지순례를 간다. 단순한 관광의 의미를 넘어 신앙 행위로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성지에 들어서면 마음이 고요해지기도 하고, 다양한 건축물이 주는 메시지 또한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한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통과의례 같은 의식이 벌어진다. 어른들을 위한 깜짝 노래자랑 코너가 열리는 것이다. 노래 한 곡씩 불러보자는 말에 어느 할머니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를 부르고 싶단다. 늘 조용한 분이셨는데 분위기가 맘에 들었는지 눈빛이 달라졌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버스까지 흔들리는 듯했다. “세월아 비켜라 내 나이가 어때서…” 흐르는 세월을 어쩌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비키라는 외침에 마음이 짠했다.

할머니는 평소에도 노래를 즐겨 부르신다고 했다. 여행 중에 오늘 같은 분위기를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그러고 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가 있다는 건 맛깔나는 삶에 필요한 소금 구실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드럼 치는 할머니가 방송에 소개됐다. 반백의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분으로 칠십 후반의 나이라는데 표정은 오십 후반이었다. 드럼을 한 번 쳐줄 수 있겠느냐는 사회자의 부탁에 할머니는 무아지경으로 드럼을 치기 시작했다.

드럼에 심취하다 보니 싱크대 앞이나 세탁기 앞에서도 끊임없이 손과 발을 까딱거렸다. 매일 전신을 움직이며 음악을 해서 그런지 활력이 넘쳤다. 무엇을 하며 지낼까 고민하던 차에 우연히 드럼을 만나면서부터 인생이 달라졌다고 한다. 드럼과 함께하는 시간은 세상 그 어느 것과 바꿀 수 없을 만큼 행복하시다고.

한번은 일본에 갔을 때의 일이다. 공항에 도착하니 90세 할머니가 빨간 승용차를 몰고 나오셨다. 인사를 드리자 어서 차에 타라는 신호를 했다.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가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스러웠는데 걱정은 기우였다. 90세라는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편안하게 안내를 잘하시든지 불편함이라곤 별로 느끼지 못했다.

참 운전을 잘하신다고 하자 그동안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운전하는 걸 좋아하는데 자식들이 싫어했단다. 염려해주는 마음은 고마웠지만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죽음이라는 극단적 언어를 사용하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한다. 그때의 저항으로 오늘날 이렇게 여러분과 만나면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으니, 너무 잘된 일 아니냐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쯤 누구와도 타협하지 말라 조언한다.

나이에 걸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할머니의 열정을 보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젊은 시절은 누구나 화려하고 열정적이었다가도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면서 서서히 균형을 추구하게 된다고 한다. 균형이 맞는 물건은 움직이지 않는다. 생동감이 사라진 것이다. 자연의 이치다. 열정이 젊음이라면 균형은 죽음이라 표현한 이탈리아의 빈첸초 곤자가가 떠오른다. 결국 열정을 가지고 끊임없이 도전할 때 우리는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열정과 균형을 유지하면서라도 살아 있는 자신을 확인해 보는 건 어떨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