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견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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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논설위원

“과거는 지나갔기 때문에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없으며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가하면,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과거나 미래조차도 있다는 말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관에서 영화를 상연할 때, 이미 렌즈를 지난 필름은 과거이고, 아직 렌즈를 지나지 않은 필름은 미래일 터이니, 그것에는 과거나 미래라고 없는 것은 아니다.

혹 이 우주 공간에도 수없이 많은 미래가 흩어져 있고, 그 중에서, 각 개인이 만든 지금의 조건과 합치되는 것만이 각 개인의 현재가 되고, 현재를 지나면 그것이 그 사람의 과거에 쌓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코로나에 감염되어 격리되어 있다. 코로나에 감염될 수도 있다는 미래가, 이 우주공간에 만연되어 있다가, 내가 지인들과 식사하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그 결과 코로나에 감염된 것이지 않겠는가?

두렵다. 이 사회의 누구라도 코로나에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널리 존재하듯이, 이런 저런 범법자들이 있어 신문지상에 대서특필되고, 그것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다면, 예견된 미래에 따라, 머지않아 저 범법자들과 동일한 자들이 수없이 많이 나올 것이 아닌가?

사회가 공유하는 미래가 아직 만들어져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각 개인의 미래는, 각 개인이 만든 현재의 조건에 합치되어야만,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각 개인의 미래는, 그의 과거가 현재를 이끌었듯, 그의 현재도 그의 미래를 이끌 것이며, 그래서 그의 과거를 보면 현재를 점칠 수 있고, 현재를 보면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없는 현재 없고 현재 없는 미래 없다.

흠 있는 과거를 가진 자는 흠 있는 현재를 살아갈 것이고, 흠 있는 현재를 살고 있는 자는 흠 있는 미래를 살아갈 것이다. 과거의 행적이 드러나 곤욕을 치르는 자는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그 과오를 덮어보려고 더 큰 이슈를 만들어 이목을 돌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그의 미래는 그의 과거를 벗어날 수 없다.

젊어서는 볼 수 없었더니, 나이가 들어 이제야 비로소 “현란한 말솜씨로 변명하는 사람치고 진실한 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태어날 때는 누구나 순수하다. 그것이 天命(천명)이다. 그러나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그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 같다. 소위 어떤 家風(가풍) 또는 어떤 국민성 등에 근거하여, 그 집단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 예견되는 미래들이 있고, 그러한 미래들 중에서, 한 개인이 만든 현재의 조건에 맞는 것이, 그 사람의 미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자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 부모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것은 옳다. 결코 과거 없는 현재는 없다. 그의 잘못된 현재는 과거의 잘못에서 기인된 것이며, 그 과거의 많은 것은 그 부모와 사회가 만들어준 환경이기 때문이다.

아비가 도박을 좋아하니 자식과 그 손자까지도 대물림되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도 있다. 아마도 그는 어릴 적 그 부모가 뭇사람에게 무시당하며 사는 것을 목도하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개천에서 용 났다고 칭찬하지만, 틀림없이 어려서 부터 복수심에 불타 살았으리라.

우연히 다가오는 미래는 없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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