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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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옥

눈을 떴다. 커튼 사이로 비쳐드는 빛줄기. 살며시 일어나 커튼을 들춰본다.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 반짝이는 햇살. 제주의 아침다운 싱그러운 아침이다.

딸과 둘이서만 이 섬에 온 게 벌써 세 번째다. 그때마다 제주는 비가 오거나 추웠다. 뭍보다 따사롭기를 바랐건만 남녘의 섬은 우리를 외면하며 냉혹한 현실을 일깨웠다.

딸의 나날은 추웠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전공을 살리기는 쉽지 않았고, 일자리를 얻는 일 또한 만만치 않았다. 몇 개의 자격증을 따서 디밀어봤지만 희소가치가 적은 자격증을 환영하는 곳은 많지 않았다. 취직과 이직, 전직을 반복하며 보낸 시간들. 아이의 방엔 빠진 건지 뽑은 건지 알 수 없는 머리칼이 수북했다.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될 땐 딸과 함께 집을 나섰다. 입으로는 괜찮다 기다려보자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불안이 새어나올 때, 그땐 나도 아이도 떠나야 할 때임을 알았다. 섬사람들은 육지로 나와야 숨통이 틘다고 하지만 나는 섬에 오면 시름이 좀 잊혔다. 사방이 툭 트인 바다에서 생각 없이 파도 위를 겅중거리다 보면 마음이 풀렸다. 비가 흩뿌리는 초겨울의 바다, 인적 드문 그곳에서 소리라도 맘껏 지르면 좋으련만 아이는 표정 없이 엉거주춤 서 있을 뿐이었다.

“날씨 어때요?”

돌아눕는 딸이 덜 깬 목소리로 묻는다. 햇살은 투명하고 바다는 잔잔하다고 말해준다. 아이는 조그만 소리로 “다행이네.”하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빛이 새어들지 않게 커튼을 여미고 나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아이 얼굴을 바라본다. 평화롭다. 갈등과 인내의 터널을 지나 얻은 시간, 어렵게 얻은 평화다. 아니, 어쩌면 이 평화는 나만의 것인지도 모른다. 소중하게 끌어안았던 꿈을 원하지 않는 무언가와 맞바꾼, 어쩌면 아이에겐 손해난 물물교환 같은 헛헛한 평화일지도 모른다.

딸에게 직장 생활이 어떤지 물으면 ‘다 좋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나에겐 ‘다’라는 말이 걸린다. 현실에 맞춰 수정한 경로와 생경한 업무, 늦은 나이의 신입사원이 겪을 스트레스가 적지 않으련만 식구들을 안심시키려는 제 나름의 배려로 읽히는 것이다. 모처럼의 휴가계획으로 호텔을 잡고 비행기 표를 예약하며 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제 힘으로 어미를 제주에 데려온 이 여행 역시 ‘다 좋다’는 대답의 다른 표현이리라. 세상 일이 어떻게 뜻대로만 될까. 다소 힘겨운 출발이지만 한발 한발 영역을 넓히며 터를 다져가기를 바랄 뿐이다.

“지난 번 그길 걸을까?”

자는 줄 알았던 아이가 불쑥 말을 붙인다. 사려니 숲길, 작년 초겨울 비가 오고 몹시 추웠던 날에 걷던 길이다. 그 때 나는 딸과 함께 그 길을 완주하고 싶었다. 쭉쭉 뻗은 삼나무, 겨울의 문턱에서도 잎을 떨구지 않고 푸르게 버티는 상록수 사이를 걸으며 아이가 제 삶에서 길을 잃지 않기를 바랐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꿋꿋하게 견디는 법을 무언의 나무들에게서 배우기를 원했다. 저 말고도 힘든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그들과 등을 기대고 온기를 나누며 춥고 스산한 삶을 헤쳐 나갈 의지를 갖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우린 돌아서야 했다. 아침에 먹은 음식이 얹혀 몹시 고생했던 기억. 딸에게는 결코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을 텐데, 의외의 제안이다.

아이의 한마디에 내 마음은 한껏 부풀어 오른다. 이런 날, 초록의 숲 사이로 스며드는 빛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소슬한 바람에 땀을 식히며, 딸과 함께 숲길을 걷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는 이미 그 때의 내 마음과 의도를 모두 읽고 있었던 것 같다. 가지 못했던 길을 이어 걸으며 제 마음을 다지고 한 번 더 어미를 안심시키고 싶은 의도. 시련 속에서 성숙해진 아이를 느낀다.

마음은 벌써 붉은오름을 지나고 월든 삼거리를 거쳐 물찻오름을 향하고 있다. 오늘이야말로 ‘다 좋은’ 날이 될 것만 같은 예감. 커튼을 열어젖히고 찬란한 햇살을 불러들여 딸을 일으킨다. 선물 같은 시간, 정말로 소중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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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현 2022-08-25 20:49:45
'딸의 나날은 추웠다'라는 표현과 '다 좋다'는 따님의 반어적 어법에서
다 큰(?) 자녀를 둔 부모라는 이름의 공통분모가 갖는 깊이와 무게를
느끼게 합니다.
모처럼 찾은 이곳에서 '헛헛한 평화'면 어떻습니까?
'지금'이라는 귀한 시간을 곱게 꿰매어
앞으로 딛는 걸음마다 꽃길이길 응원합니다.
.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