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가 지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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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숙, 제주복식문화연구소장

올여름은 유독 습한 더위로 마치 한증막에 갇혀 지내는 듯했다. 밤이 되어도 온도가 내려가지 않아 집집마다 냉방기를 틀어놓으니 에어컨 실외기 소음과 토해내는 더운 공기로 열대야를 더 부추긴다고 그래서 깊은 잠을 잘 수 없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안내문자가 코로나 상황과 함께 폭염주의보가 핸드폰마다 울리고 폭염에 대한 뉴스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원인이 환경오염에 의한 재앙이라고 떠들지만 어떻게 하자는 시원한 소리는 잘 듣지를 못해 더 덥기만 한 여름이다.

여태 살아오면서 올여름처럼 처서를 그렇게 기다려 본 적이 있을까 싶다. 달력을 들춰보며 조금만 더 버티면 더위가 그친다는 처서가 온다며, 절기는 무시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아무리 맹렬해도 때가 되면 물러나겠지 하며 하루하루 버텼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정말이지 처서가 지난 다음 날부터 공기가 달라지더니 요즘은 습기가 사라져 해가 지면 선선해서 살 것 같다. 덩달아 하늘도 더 맑고 높아 가을 문턱에 들어선 것이 맞다.

처서가 지나면 더위만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풀들도 더 자라지 않아서 제주속담에도 처서 넘으민 풀 더 자라지 않는다고 해서 골갱이(호미)를 씻는다고 한다. 또 극성을 부리던 모기도 입이 비틀어진다고 하는데 아마도 처서가 지나면서 점차 모기의 독성이 약해지기 시작해서 나온 말일 것이다. 이처럼 처서는 더위가 물러나길 바라는 사람들과 밭에 잡초를 매며 농사를 지었던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기다려지는 절기다.

때가 되어야 더위가 물러나는 것처럼,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이루어지기까지 기다림이 있어야 함에도 우리는 기다림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그때를 앞당겨보려고 애를 쓰며 살 때가 많다. 그런데 애를 쓸수록 앞당겨진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야속하게도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음을 살면서 느낀다. 반드시 기다림이 꼭 필요한데 쉽게 기다림에 지쳐버리거나 포기해서 후회했던 일도 많지 않았을까. 또한 그 끈을 놓지 않고 바라보며 가다보면 만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남을 직접경험이든 간접경험이든 해보았을 것이다.

올여름처럼 내일 아침이면 좀 나아지려나, 이번 비가 오고나면 좀 나아지려나, 기대를 하지만 여전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살다보면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도 만난다. 그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고 놓아버리지 말고 그 끈을 꼭 잡고 가다보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체면을 걸어보자. 말이 씨가 되고 생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그려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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