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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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칠팔 명의 남자들이 한자리에 앉아있다.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 팔십 나이가 코앞에 다가온 이들이다. 백세 시대라곤 하나 웃음 띤 얼굴들이 모두 아이들 같다. 대화 내용을 들으면 더더욱 흥미진진하다. 모두 개구쟁이 시절로 급강하했으니 천진난만 그 자체다. 이 순간만큼은 지나온 세월은 사라지고 코흘리개 시절의 장면 장면이 클로즈업되며 깊이 빠져든다.

한 친구는 앉아서 얘기하기에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일어나서 팔다리까지 동원하여 열변을 토한다. 보다 못한 옆 친구가 웃음을 참으며 “다 알아듣고 있으니까 앉으라”며 목청을 높여 보지만 호통을 치거나 말거나 아랑곳없이 열변은 이어진다. 결국 참았던 웃음이 터지고 모두 웃음바다가 된다.

어느 식당에서의 풍경이다. 옆 손님에게 방해 주지 않을 요량으로 미리 조용한 방을 예약한 건 잘한 일이다. 시골 초등학교 코흘리개 시절, 흉허물없이 모래판에서 뒹굴며 함께 자란 칠십 년 지기 동창 친구들이다. 경조사는 물론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 번 빠짐없이 모여 정을 나눈 지도 수십 년이 된다. 코로나 사태로 모임을 중단했다가 오랜만에 만났으니 모두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른다. 그런데 앞에 앉은 친구 얼굴을 찬찬히 보니 예전과는 다르게 뚜렷이 나이 드는 그림자가 선명하다. 아차. 남 이야기할 때가 아니지. 나도 예외가 아닐 터인데 앞 친구를 염려하게 되는 걸 보면 이 또한 세월에서 얻은 자애심이라 해도 될지는 모르겠다. 친구도 나도 노인 티가 나는 것은 정상일 터다.

어려운 시절을 묵묵히 이겨내고 걸어온 친구들이다. 이 중에는 더욱 반가운 한 친구가 있다. 제주 4·3 당시 산간 마을에서 부모님 두 분을 하루아침에 잃고 살던 집마저 불에 타 없어지자 형제자매들만 피신하여 우리 마을로 내려온 친구다. 상상해 보면 그 어린 나이에 우여곡절을 이겨내는데 세상에 대한 분노와 원망도 오죽했으랴. 그런 연유에서인지 술을 마시면 누구도 말리지 못할 정도로 과격함을 드러내어 걱정스럽던 친구였다. 그러던 친구가 몰라볼 만큼 유순하게 성격이 변했다. 짐작 하건데 부인의 내조 덕분도 크다고 보고들 있다. 잘 마시던 술도 끊고 금실 좋은 부부로 넓은 전원주택에서 만년의 삶을 여유롭게 맞이하고 있다. 오늘은 부인과 함께 동석하여 자기가 저녁을 한 턱 쏘겠다고 극구 고집한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한 친구 역시 세파를 꿋꿋이 극복하고 지금은 내로라하는 대형 사업장 대표로 나름의 부를 누리고 있다. 그 외에도 모두가 건재하다. 건설업, 운수업, 전자업 등 공직에서 은퇴 하여 여유 있게 취미생활들을 하는가 하면 교수로 정년 퇴임을 한 후 관련 분야에 공헌하며 존경을 받는 친구도 있다. 이쯤이면 오늘 만난 친구들은 인생을 후회 없이 잘 살아왔다고 말할만하다.

이야기가 무르익는 중, 한 친구가 가물거리는 기억을 떠올리며 그럴싸하게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그 말을 듣던 옆 친구가 틀렸다고 하며 말씨름이 벌어진다. 맞으면 어떻고 안 맞으면 어떠하랴 그저 싱겁게 하는 말인걸. 나는 진화하느라 정신없다. 그러다가 서로 어이없었는지 허허롭게 웃는다. 어느 구석에도 악의적 의도나 이해관계는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순수하고 천진난만할 뿐이다. 긴 세월, 속세에 맞서 슬기롭게 헤쳐왔기에 인간 완성의 경지로 근접해 가는듯하다. 성냄도 욕심도 다 내려놓고 훌훌 비워내어 홀가분한 기분으로 미지의 다음 세계를 맞이할 마무리 준비를 하는 것이 우리 세대가 취할 현명한 선택의 길이 아닐까 싶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며 시간이 꽤 흘렀는데 코흘리개 시절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할 기세다. 분위기가 잠시 누그러진 틈을 타 한 친구가 제동을 걸어 샘솟듯 솟아나던 이야기가 진정된다. 헤어질 시간이다. 걸을 수 있는 한 빠지지 말고 다음에도 꼭 만나자며 잡은 손에 한 번 더 힘을 준다. 돌아오면서도 입가의 미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석양 길을 함께 걷는 동반자가 있음은 큰 위안이다. 서로 인생의 거울이 되어주고 있기에 오늘은 더욱더 친구들의 건강을 마음 깊이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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