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에
이 가을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김길웅. 칼럼니스트

지난여름은 무척 더웠다. 긴긴 여름 하루종일 비 내린 날이 없었던 것 같다. 하늘에서 가마솥을 걸고 불을 때기라도 하는 듯 연일 한증막 같았다. 폭염주의보로 기상도엔 섬이 산딸기처럼 빨갰다. 작은 섬이 불타는 것 같았다. 낮엔 노상 34도를 오르내려 대구를 웃도는 땡볕더위, 밤엔 푹푹 찌는 열대야에 뒤척이며 밤잠을 설쳐야 했다.

육지는 기록적 폭우로 물난리였는데 이럴 수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무덥고 목마른 여름이었다. 지난 6월, 7월엔 참 비가 그리웠다.

덥다, 덥다만 입에 발리다 보니, 활기찬 여름의 왕성한 생명감마저 그만 눈에 나 버렸다. 그런 바람에 시종 투덜거리며 한철을 나고 말았잖은가. 하늘을 우러러 바라던 비는 끝내 흐지부지하고 지나갔다. 자연은 매정했다.

읽다 하품하게 지루한 만연체의 문장에 마침표(.)가 있어야 하듯, 일 년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차례로 오간다. 순서를 따르는 선순환구조다. 섭리인 걸 알면서도 언뜻언뜻 잊고 사는 게 사람이다.

가을이다. 인제 여름은 제풀에 꺾였고 눈앞으로 가을이 왔다. 여름이 흐느적흐느적 스러지고 있잖은가. 계절은 이미 얼마 전부터 여름이 다한 자락으로 가을바람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덩달아 숲이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나대는 새들 울음소리도 청량하게 들리느니, 그 음조 시종 서늘하다. 암만 보고 들어도 신비로운 게 자연이다.

문득 마음 깊숙이 사려 두었던 낱말, ‘가을’을 꺼내놓는다. 만인이 좋아하는 계절이다. 불타는 여름의 능선을 넘어 고단한 우리 앞으로 당도한 가을은 이제, 외로운 실존에게 고독의 계절답게 존재의 근원적 허무를 끌어안는다. 성숙과 완성의 시간이다. 깊은 사유로 성숙하면서 열매로 익어 탐닉한다.

시인 김현승은 고독의 시인 릴케를 닮고자 했다. 지독히 흠모했다. “마지막 과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릴케의 <가을날>이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의 정조(情調)에 바투 닿은 게 우연이 아니다.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라 <가을의 기도>를 노래했다.

두 편의 시가, 신의 섭리가 인간의 실존 내면에 자리 잡은 근원적 고독에 대한 성찰에 직핍(直逼)했다. 기도조로 일관하면서 밑바닥에 경건한 분위기가 끈끈하잖은가. 흡사 신과 시인이 귓속말로 교감하듯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다. 빛과 어둠, 원숙함과 고독이 어우러진 가을의 교향시다.

아직 들떠있다. 하오의 지열을 피해 아파트 뜰에 내린다. 타는 여름에도 나무들은 실팍하게 가을맞이 채비를 해왔다. 그새 눈에 띄게 불어난 몸집과 우뚝 솟은 수세(樹勢)가 놀랍다. 몇 뼘의 키를 키우며 가지를 뻗었다. 꽃이 질 때를 기다려 열매를 맺는다. 감, 비파, 무화과, 금귤…. 외진 데 뿌리 박은 생명에게도 신의 은총은 내린다.

저들 위로 아침마다 무서리가 내릴 것이고, 내리쬐는 가을 햇볕 그리고 산을 내린 산들바람이 가지와 잎을 흔들 것이며, 새들의 내왕도 잦을 것이다. 여름 뒤로 기어이 가을이 왔다. 이 가을에 사람들은 노심초사, 기다릴 것이다. 무서리와 햇볕과 바람과 새소리에 익어 갈 과육, 새빨간 완숙의 노작, 그 열매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