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고통 속 신음하는 민중 위해 혁명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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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봉기 이재수
이장영, 청년 항일운동가 일제 수탈에 맞서 ‘싸워’
이재수, ‘신축민란’ 주도 부패한 종교-권력에 저항
이정미, 재일동포 2세 가수 상생·평화 등 메시지 전해
이재수는 일부 불량 천주교도들의 횡포에 대항해 1901년 일어난 신축민란의 장두였다. 교인들 수백 명을 학살하는 참극 후 프랑스 함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 관에 자수해 교수형에 처해진다. 사진은 신축민란 대정 삼의사비.
이재수는 일부 불량 천주교도들의 횡포에 대항해 1901년 일어난 신축민란의 장두였다. 교인들 수백 명을 학살하는 참극 후 프랑스 함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 관에 자수해 교수형에 처해진다. 사진은 신축민란 대정 삼의사비.

이장영李章瑩1912(일제강점기)~?, 중문리 청년의 항일 활동. 본관은 고부 벽동공파’, 중문면 중문리 -태생으로 중문에서 주류 판매업을 운영, 항일인사 32명에게 최고 7년형으로부터 10월형까지 각각 유죄 인도가 내려졌다. 일제는 항일 청년을 징벌하기 위해서 가택 수색, 협박, 폭력 행위, 제례(祭禮) 방해 등의 명목으로 구속한 바 있다. 1933228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그에게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1932년 재건 야체이카 운동에 함께 연루되었던 사람 가운데 직접 야체이카 조직과는 상관없지만 김한정(金漢貞·가파도)의 영향 아래 항일 활동을 했다.

이에 앞서 54일 중문경찰관주재소에서는 중문초등학교 아동 김성원(金成元) 4명을 인치(引致) 취조하고 동교 생도 이성문(李成文)의 모친을 검거한 후 제주경찰서로 압송하자 초등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단행한 바 있었다.

이 일로 일제 당국은 조선일보 지국장 김한정과 소비조합 이사 진택주의 가택을 수색한 후 검거, 또 진철주(秦徹周), 강문범(姜文範) 등과 소년단 지도위원 이장영 외 6명도 검거 취조한 뒤에 석방했다. 그런데 193112월부터 구좌면 동부의 하도, 종달, 연평(우도)리 해녀들과 성산면 서부의 시흥(심돌), 오조리(오졸-)의 해녀들이 세화리(가는-)로 모여 집단적으로 항일운동을 일으켰다.

이 저항 운동은 다음해로 이어지면서 더욱 격화돼 전라남도 경찰관이 증파되면서 겨우 진정됐다. 일제 당국은 청년남녀 100여 명을 잡아 가뒀다. 이 운동의 핵심 인물 강창보는 검거된 후 탈출해 기소 중지가 되고 항일 인사 50여 명은 1932514일 목포 경비선으로 실어내어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이들 가운데 40명을 해녀 항일운동의 배후 인물로 옭아매었다. 1933217일 재판에 회부, 이때 자진해 나온 변호사 이의형(李義珩·제주), 김성호(金聖浩), 윤명룡(尹明龍) 3명이 열변으로 변호했다.

영화 ‘이재수의 난’ 스틸 컷.
영화 ‘이재수의 난’ 스틸 컷.

이재수李在守1877(고종14)~1901(광무5), 한말 제주 신축민란의 주동자. 교수형을 받아 집행됐다. 본관은 고부 벽동공파’, 대정읍 인성리 대정-에서 아버지 이시준(李時俊)과 어머니 송씨 차남, 그는 일본인 어상 아라카와-도메주로(荒川留重郞)의 일본도로 교인들도 김창수(金昌洙) 목사에게 청해 무기고를 허물었다. 528일 도민들은 제주성을 함락시키고 닥치는 대로 교인들을 살육, 이에 프랑스 신부들은 뮈텔(Mutel·閔德孝) 주교를 통해 프랑스함대의 도움을 요청. 함대가 제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고비를 넘기고 이재수에 의해 천주교 신자 400여 명이 학살된 뒤의 일이었다.

1901년 이재수의 난(일명 제주교난)이 일어날 무렵 이미 제주도에는 영세를 받은 천주교도가 242, 또 예비신자가 600~700명에 이루고 있었다. 당시 이 섬에는 일본 어채인(漁採人)들이 대거 진출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불법적인 통어(通漁)활동을 자행했으며 특히 이라가와(荒川留重郞) 같은 사람은 어로독점을 위해 프랑스 선교사를 축출하려 하고 있었다. 또한 지방관리들은 그들대로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한편 정부에서 파견된 제주도 봉세관(捧稅官) 강봉헌은 평안도 출신으로 엄청난 양의 잡세를 징수했고 거기에다가 이러한 일에 천주교인들을 채용하고 있었다. 결국 채구석 일파와 일본인들은 경제적으로 봉세관의 방해를 받게 되었으며 천주교도들에게도 적의를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주교도들은 자신들의 차지한 토지내의 신당·신목들을 불살라버림으로써 이미 있었던 도민들의 배타적이고 미신적인 감정을 더욱 조장했다. 이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은 190122일에 있었던 도민 오신락(吳信洛)의 죽음에 있었다. 그와 대립해 왔던 현유신(玄有信) 부자는 이 사건의 책임을 천주교도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이재수는 1901년 민란 당시 인성리 이강(里綱)으로 있었으며 민란의 2차 봉기 때 오대현이 관군에 붙잡히자 이재수는 그의 뒤를 이어 서진장(西陣將)으로서 비타협적 무력 투쟁을 강행한 장본인이다. 그래서 반서교적(反西敎的)인 도민들은 1901년의 신축민란을 이재수란이라고 부르며 영웅시했다.

당시는 계속되는 흉년과 경래관(京來官)의 탐학(貪虐)으로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정부에서 파견된 봉세관 강봉헌(姜鳳憲)의 지나친 세금의 징수와 이와 결탁한 일부 군민과 천주교도의 작폐가 심각했다. 이에 대정의 유림들과 대정상무사(大靜商武社·대표 채구석蔡龜錫)의 회원들이 서교西敎(천주교) 배척운동을 일으켰다. 19015월 천주교 신부들이 서울회의에 참석하러 간 틈을 타서 상무사원들이 천주교인들을 구타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더욱 악화돼 상무사원들은 도민들을 움직여 제주성으로 쳐들어 갈 계획을 세웠다. 516일 서진장 이재수와 동진장(東陣將) 강우백 등의 지휘 아래 수천의 도민들은 제주성을 포위했다.

이재수의 난은 천주교난이어서 선교사의 보호를 목적으로 프랑스 병함(兵艦) 2척이 산저포(山底浦) 가까이에 접근해서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었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정부는 어채인(漁採人)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전함을 제주 근해에 출진했다.

이 사건은 결국 국제적인 성격과 문제점으로 비화된 상태였다. 이런 상태여서 삼읍 민중이 크게 일어나 서울에서 내려온 정부군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진장두 이재수는 일본인 아라가와의 감언이설로 신부를 죽이고 유사시에는 별량도別良島로 와서 피하고 이곳에서 배를 타면 일본으로 보낼 터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프랑스 신부를 꼭 죽여라고 하니 이재수는 이 말에 따라 신부를 죽이려 했으나 채구석의 만류로 실현하지 못해 국제간의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군대를 보내 수습하려 했으며 613일까지 강봉헌, 채구석, 오대현, 이재수, 강우백 등 연루자를 서울로 잡여 민란은 진압됐다.

또 하나의 문제는 사망자들의 영장지(營葬地)를 청하는 것이었다. 본래 영장지는 프랑스함장과 제주목사 사이에 이뤄진 약속이 있었으나 사건 후 1년이 지나도록 유골을 그대로 방치돼 있어, 이에 프랑스공사가 해결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는 그 뒤에도 오랜 시일을 끌다가 1903년말부터 사라봉 아래에 있는 황사평(黃紗坪)으로 유골을 안치함으로써 끝이 났다. 영장지 문제가 종결됨과 아울러 19031116일에 배상금 원금 5160원의 조선정부에 의해 청산됐다. 그리고 앞서 석방된 채구석은 배상금의 이자인 722원을 도민들로부터 거둬 처리했다. 이때가 1904627일경이었으며 3년만에 사건이 종결된 것이다.

이정률李定律1896(건양1)~1969, 사업가, 본관은 고부 벽동공파’, 호 혜광(慧光)이고, 대정읍 모슬포(모실-)에서 이기빈(李基彬)과 황씨(黃氏) 사이에 낳은 62녀 가운데 장남이다. 일인(日人) ‘오다’(大田)에 의해 설립된 모슬포 통조림공장에서 기술을 익혔다.

입사한지 12년이 되는 1929년 함경남도(咸鏡南道) 서호진(西湖津)에 정착했다. 19301250여 명을 고용하는 공장을 차리는데 성공했다. 1935년 여름 애월포(-)에 소라통조림공장이 날로 번창, 단추로 만들어 성공했다.

이 무렵 강성익(康性益·법환), 현승오(玄承五·성산포), 송권은(宋權殷·하귀)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용수리에(현 김대건신부 표착기념관 남쪽) 우물을 개발해 통조림공장 사업을 확충하고 1943년까지 소라 가공 사업을 계속 밀고 나갔다. 애월에 공장을 세운 후인 어느 해 곽지(郭支) 바다 모래밭에 대합(大蛤)조개가 대풍을 이뤄 주민들이 쩔쩔매고 있었다.

이정율(李定律)은 조개를 대량으로 사들였다. 해삼을 건조시키는 방법을 연구해 제주바다에서 흔한 홍해삼을 건조시켜 중국에 수출 길도 열었다.

이정미李政美()1958~?. 가수, 재일동포(원적 제주도) 2세 가수(歌手), 1983년 한국의 민요, 가요, 가곡 등을 모은 음반 새야! 새야!’를 발표했고 1986

김민기金敏基를 노래한다.’를 발표했다. 1997년 자작곡을 중심으로 한 제1집 앨범 나는 노래하네를 발표했다. 1996년부터 일본에서 콘서트와 인권집회 등에서 연간 100회 이상 공연활동을 하고, 한국과 일본 사이의 진정한 화해와 상생을 위한 생명과 평화를 위한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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