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 삼촌’이 부르짖는 평화와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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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혁, 시인·문화비평가/ 논설위원

제주가 낳은 오페라 「순이 삼촌」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되어 탄성을 터뜨리고,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어진아’라고 부르는 아리아가 귓가에 맴돈다. 옴팡밭에서 어린 아이들을 잃고 감당키 어려운 격정의 슬픔은 그저 ‘아-아-’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순이 삼촌’의 울부짖음 속에 담긴 ‘평화와 인권’이라는 제주4·3의 가치를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얼마 전 여름 한철 고생하며 작성한 만해 한용운의 사상과 시문학을 다룬 논문의 ‘평등, 평화, 자유’와 제주4·3의 가치가 겹쳐졌다.

한용운은 「조선독립의 서」에서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며,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 썼다. 가장 이상적인 행복의 바탕은 자유와 평화에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평화의 정신은 평등에 있다 하고, 참된 자유는 반드시 평화를 동반하고, 자유와 함께 한다고 했다. 평등 없는 평화와 자유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니 평등이 맨 앞에 놓인다. 제주4·3이 말하는 ‘인권’은 평등의 다른 표현이다.

만해가 말하는 평등은 현대적 개념과 조금 다르다. 권리나 의무, 자격 따위의 차별이 없음을 말하기 전에 그는 평등을 ‘진리’가 구현된 모든 존재들의 평등이라 말한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평등이며, 거기에는 ‘어리석음과 깨달음[迷悟]’의 상대적 차이가 있을 따름이라 했다. 평등의 하위 영역에 자유주의와 세계주의를 더했다. 평등하므로 자유롭고, 각 개인을 세계 사회의 일원으로 파악하는 세계주의가 성립된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모두가 평등하다는 인식은 현대사회의 가치에서 맨 앞자리에 놓여 있다. 인종, 남녀, 계급, 민족 간의 불평등을 없애는 것뿐만 아니라 기후위기의 시대에 뭇 생명 간의 불평등까지 없애야 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행한 인류의 싸움은 불평등을 평등으로 바꿔가는 노정이었다.

해방을 맞아 남한만의 단정, 단선을 거부하고 통일을 꿈꾼 제주 민중의 목숨을 빼앗은 권력자들은 평등을 거부한 자들이었고, 당연히 평등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평화와 자유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평화나 자유가 권력자들만의 평화와 자유라면 결코 민주주의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분단체제의 극복, 곧 한 민족의 평등 없이는 평화와 자유가 늘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평화를 부르짖는 미국의 평화는 팍스로마나처럼 미국에 의한 세계 지배가 유지되는 상황을 뜻하는 팍스아메리카나의 평화다. 미국은 2차 대전 후 세계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늘 전쟁을 이끌었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이라는 동아시아 전쟁에서부터 중동의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중동 전쟁,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이끌며 그들은 자유와 평화를 말한다. 그 뒷배에는 무기를 팔아먹는 군수산업체가 존재한다.

미국 주도의 거짓 평화의 맨 앞자리에 제주4·3의 원죄가 있다. 미군정보고서에는 제주를 ‘빨갱이 섬(red island)’이라 규정하고, ‘빨갱이 사냥(red hunt)’을 지시하는 내용이 남았다. 미국이 소련과의 대결 과정에서 반공보루를 쌓는 데 방해가 된다면 빨갱이로 간주해 사냥하라고 했다. 미군정 치하의 제주도민 학살의 책임이 엄연히 미국에 있음을 그들은 알아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평화와 인권은 4·3의 원죄를 씻어내지 못하고서는 허울 좋은 레토릭에 불과하다.

아직도 순이 삼촌의 아리아가 귓가를 맴돈다. “근원에 닿으면 / 진실하고 선하며 아름답다. / 잃어버린 입술을 달싹이며 / 사라져버린 사람들에게 닿으려는 / 몸부림을 보았다. / 깊이 가라앉은 피눈물이 솟구쳤다.”라고 감상의 시를 썼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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