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의 영원한 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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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자, 이중섭미술관 학예연구사/ 논설위원

지난 8월 13일 이중섭의 영원한 뮤즈, 이남덕(李南德) 여사가 만 100세의 춘추로 이 세상을 떠났다. 이중섭 사후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며 살아온 세월이 66년이다. 66년의 긴 시간 속에는 이중섭과 결혼해서 행복했던 7년간의 사랑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이중섭은 1939년 일본 문화학원 미술과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아담한 체구에 미소 짓는 모습이 귀여운 마사코는 미츠이(三井) 계열의 전일본창고주식회사 사장의 딸이었다.

생전에 이남덕 여사는 “어느 날 쉬는 시간에 학교의 뜰에서 남학생들이 배구경기를 하는데 그 중에 마음에 드는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청년이었죠. 그때는 그가 조선 사람이라는 것도 몰랐어요. 그는 못하는 운동이 없었어요. 권투도 잘했고 철봉, 뜀박질 등을 멋있게 했었죠. 그뿐 아니라 노래도 잘 불렀죠. 가창력이 뛰어났고 제법 정통적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라고 이중섭을 회고했다.

어느 날 실기수업을 마치고 수돗가에서 이중섭과 마사코가 붓을 빨게 되었는데 이중섭이 마사코에게 말을 걸었고, 그 후 두 사람은 데이트를 즐겼다. 그때부터 이중섭은 문학소녀 마사코에게 보들레르, 발레리, 릴케 등의 시를 암송해 들려주거나 베껴서 건네주었다.

그 시절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많은 엽서화를 보냈다. 엽서화는 글자 없이 오로지 그림만 그려서 보낸 엽서를 말한다. 이남덕 여사는 1979년, 그동안 고이 간직해오던 엽서화 88점을 처음 공개하면서 “남편이 사무치도록 그리울 때면 엽서화와 그림을 어루만지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으나… 남편의 천재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전시를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중섭은 1943년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작품을 출품해 높은 평가를 받았고, 한신태양사에서 제정한 태양상 수상과 함께 부상으로 팔레트를 받았다. 이중섭은 이 팔레트를 사용하다가 1943년 원산으로 귀국하면서 연인 마사코에게 맡겼다. 2012년 이남덕 여사는 70년간 남편의 분신으로 생각하며 보관해오던 그 팔레트를 이중섭미술관에 기증했다. 남편에게서 받은 사랑을 많은 사람에게 전해주고 싶다는 뜻에서였다.

이중섭은 1944년 12월 말경 “마사코와의 결혼을 서두르고 있소. 자세한 내용은 편지로 보냈으니 즉시 답장해 주기 바라오.”라는 전보를 일본으로 보냈다. 마사코는 혈혈단신 사랑을 좇아 1945년 4월 태평양전쟁 말기의 공습이 심해진 도쿄를 뒤로한 채 연락선에 올라 천신만고 끝에 조선에 도착했다. 이때 이중섭은 사과와 삶은 계란을 들고 와 마사코를 맞이했다. 이남덕 여사는 이때의 사과 맛과 이중섭의 따스한 품은 평생 잊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중섭과 마사코는 1945년 5월 사모관대에 족두리를 쓰고 결혼을 했다.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南쪽에서 온 德이 많은 여자”라는 뜻으로 “남덕(南德)”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1947년과 1949년에 두 아들이 태어나 단란한 생활을 하던 이중섭 가족은 1950년 12월 월남해 1951년 서귀포에서 약 1년을 살고, 이듬해 6월에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으로 떠났다. 이중섭과의 재회를 위한 이남덕 여사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손에는 1956년 9월 이중섭의 사망전보가 전해졌다.

“아고리(이중섭 별명)와의 만남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다시 태어나도 아고리와 함께할 거예요.”라던 이중섭의 영원한 뮤즈, 이남덕 여사가 이중섭의 품으로 돌아갔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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